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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Sep 07. 2021

미워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의 차이는 감정에 쓰는 에너지의 차이다. 싫어하는 사람은 피하면 그만이다. 볼 때마다 불쾌하고 찝찝한 여운이 남지만 뱀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 된다. 모든 대화가 비호감으로 흐르는 사람, 아는 것을 부풀려 젠체하는 사람, 외양과 습관이 지저분하고 매너 없는 사람이 그렇다.


미워하는 사람은 다르다. 나는 두 명의 사람을 미워한다. 그들을 미워하는 감정은 연중무휴다. 대화 도중 "00은 요즘~"하며 누군가 그들의 근황을 업데이트하면 썩은 고기라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눈빛이 돌변한다. 제발 그냥 넘겨, 덥석 물지 마! 하고 단도리해보지만 소용 없다. 어느새 육두문자 남발하며 그들을 욕하고 있다. 방언 터진 광신도가 따로 없다.


그들이 과거 나에게 한 짓 때문이다.


살면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물론이고, 나는 진심으로 그들의 말년이 불행하길 바란다. 아프거나, 망하거나,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초라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들이 나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면 그래도 싸다. 나의 자존감을 짓밟고 정신적 수모를 겪게 했다. 좌절과 슬픔, 무력감을 학습시키는 한편 그들의 칭찬에 목마르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의 직장 상사였다.


혹여 우연히 마주쳤을 때를 대비해 대사를 읊어보기도 한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 상상 속 나는 <친절한 금자씨>처럼 서늘하게 이 대사를 내뱉는다. 현실의 나는 아직(아마도 영영) 그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저 조용히, 그들과 겹치지 않는 영역에서 그들의 말년을 저주할 뿐이다.


가끔 그들의 소식을 듣는다. 사실  자주 듣는데, 세상에 정의란 것이 존재하긴 하는지 악당 1  심한 위기를 겪었단다. 사람이 아프거나 다쳤단 소식을 들으면 앤간치 미운 사람 아니고서야 측은지심이 들기 마련인데, 어라라? 일말의 측은함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단어는 <쌤통>이었다. 아이와 함께 읽는 전래동화의 결말 같았다. 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지요.


지난 주말 어나더 악당의 모친상을 전해 들었다. 악당 2는 악당 1만큼 뼛속까지 악당은 아닌지라 그 소식에 마음이 약간 일렁였다. 악당 2는 심성이 약하고 자존감이 낮아서 역으로 남을 공격하는 사람이었다(그걸 알면서도 당했다.). 악당 2의 신혼집에 놀러 가고 출산 후 조리원도 찾아가고 그의 온갖 경조사를 함께했다. 술자리도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항상 "당신이 너무 싫지만 당신을 견디기 위해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한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고운 인상의 분이셨다. 아버지는 원래 안 계셨고,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그 사람은 이제 고아가 되었다.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의지할 부모 없이 아이를 키우게 된 그 사람이 왠지 짠하게 느껴졌다. 연락을 해 볼까?라는 <왜 이래 김나영 정신차려> 류의 생각이 빛의 속도로 지나갔다. 그러지 말자.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손을 내밀어. 다만 그를 미워하는 마음의 우물이 스스로 말라갔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과거를 파내고 또 파내서 새로운 미움을 샘솟게 하진 말자. 지금 남아 있는 감정이 자연스레 사라질 때까지 내 마음을 다독이며 살겠노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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