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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Dec 14. 2021

죽도 밥도 아닌 연애

별 거 아닌 연애의 단상 #3 

<병신>


대희를 주제로 논문을 쓴다면? 영화를 기획한다면? 노래를 만든다면? 제목으로 이만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병신, 병신 같다. 대희는 어느 한 부분이 완전히 비어 있어 언제나 짝짝이처럼 보인다. 자혜가 좋아하는 브릿팝 밴드의 보컬은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완벽하다. 선천적 장애를 영감으로 승화시켜 위대한 예술가가 됐으니깐. 


대희의 눈은 아무 장애도 없는데 항상 흐리멍덩하다. 이른 아침에 문을 열긴 했는데 하루 종일 셔터를 1/3쯤 내려둔 가게 같다. 셔터에 머리 안 닿게 조심조심하며 들어올 사람만 들어오시오-하는 식이다. 대희는 정말 그런 사람일까? 아니면 자혜가 대희를 그런 사람이라 단정하고 몰아붙이는 걸까? 


어떤 꼼수도 부릴 수 없게 생긴 대희를 보며 "박해일처럼 순수해 보여서 좋아"라는 콩깍지 멘트를 했던 게 자혜다. 자혜는 대희의 순수하다 못해 백지장 같은 성격, 삶의 스킬을 더디게 익히는 성향, 그렇게 익힌 스킬을 어렵게 피운 불씨처럼 소중히 여기는 태도, 자혜를 한결같이 존중하고 아껴주는 마음을 좋아했다. 대희는 '그런 사람'이었다. 


'병신 같아.'


자혜는 마음의 소리를 단속했다. 언젠간 열두 시를 알리는 뻐꾸기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내심 그 순간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병신!"이라고 시원하게 외쳐보기라도 했으면. 대희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가 미지근하다못해 차가워질 때까지 자혜를 기다리는 일, 마케팅의 '마'자도 모르면서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자혜의 고충을 들어주는 일, 후원금 명목의 구독료까지 내면서 구독자도 몇 없는 인터넷 매체의 칼럼을 읽는 일 외엔 꾸준히 하는 게 없었다. 도무지 먹고사는 일엔 관심도 재주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 발 딛고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능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연애 초반엔 가난하게 살아도 좋으니 일에 치이고 싶지 않다는 대희의 가치관이 귀한 유물처럼 빛나 보였다. 대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자혜는 싱크대 문고리가 맘에 들어 집을 계약한 거나 다름없었다. 전체를 보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일에 치이기 싫다는 건 일에 치여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인데. 4년을 곁에서 지켜본 결과, 대희의 가치관은 그저 생계 능력이 없는 사람이 선비의 청령함을 흉내 내는 모순의 극치일 뿐이었다. 대희의 생활력은 학습 능력으로 치면 지진아 수준이었다. 


웹디자이너가 적성에 맞지 않아 시나리오 쓰겠다며 1년 남짓 다닌 회사를 그만둔 게 2년 전, 인디스페이스니 상상마당이니 들락거리며 허송세월한 게 1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혜의 선배가 소개해준 논술학원에 강사로 들어갔다가 원장이 시키는 잔무가 도를 넘는다며 그만둔 게 6개월 전이었다. 자혜는 "도를 넘는 잔무"의 정체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명단 정리나 사소한 비용 처리 같은 엑셀 작업이었겠지. 자혜의 가슴을 만지는 손길이 느릿느릿 어설픈 것처럼, 대희는 간단한 엑셀 작업조차 손 빠르게 처리할 위인이 못 됐다. 


느린 걸까, 게으른 걸까, 모자란 걸까. 자혜는 요즘 대희를 볼 때마다 누가 이 영역을 명확히 정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느린 거면 인정하고, 게으른 거면 비난하고, 모자란 거면 위로하게. 하지만 대희는 왠지 느림과 게으름과 모자람이 겹치는 영역에 있을 것 같았다. 


인 서울 4년제 졸업. 대희의 이력은 6년째 제자리였다. 


***


대희가 샤워하는 동안 자혜는 침대에 앉아 거울을 보며 멍을 때렸다. 오늘도 망했다. 헤어지려고 했는데 헤어지지 못했다. 희망 없이 연병장을 도는 이병의 심경이다. 왜, 뭐 때문에, 대희와 4년씩이나 만났을까?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 똥강아지 같은 성격이 좋아서? 이보다 더 사소할 수 없는 것까지 지적하고 평가하는 자혜의 성격을 대희가 거스르지 않아서? 이렇다 할 벌이가 없는 것, 한 가지 일을 꾸준히 못하는 것, 욜로족도 아니면서 내일이 없는 것. 커다란 암세포가 주렁주렁 세 개나 매달려 있었지만, 대희와 있으면 편했다.


"저렇게 무능한 사람과 왜 4년씩이나 만났습니까"

"편하니까... 편해서요."


자혜는 면접관이 되어 스스로에게 가장 아픈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듯이 대답했다. "단지 편해서"로 시작하는 2차 질문(공격)이 이어져야 하나 그만두기로 했다. 늘 같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나 자신과의 인터뷰'를 마친 자혜는 <병신>이라는 표제어를 <나는 병신>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병신이면, 그런 병신을 4년이나 만난 나는 더 병신이다. 


자혜는 고개를 떨궜다. 오늘도 모텔에서 마무리하는 일상이 절망스럽다.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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