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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Feb 16. 2022

정리 강박증 환자의 육아

정리 강박이 심해서 퇴근 후 집에 오면 최소 20분은 정리부터 해야 한다. 이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불안에 사로잡힌다. 


마스크 벗어 현관에 걸고 신발 신발장 안에 넣고 시계 반지 빼서 정리하고 옷 가방 정리하고 가습기 말려둔 거 세팅하고 거실 매트 돌돌이로 한 번 밀고 베란다에 있는 빨래 걷어서 개고 다용도실에 걸어둔 옷걸이 베란다로 보내고 내일 입을 옷과 가방 챙겨놓고 남편 옷도 꺼내놓고 바닥 한 번 쓸고 머리카락 치우고 쇼파랑 쿠션 정리하고 아이 장난감과 색연필이 바닥에 떨어져 있진 않은지 스캔 


이 루틴을 진행하면서 


아이 손 씻기고 옷 벗기고 오로라 공주 드레스로 갈아입히고 공주 신발 신기고 "헤이 클로바!" 외쳐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숲속의공주 동화 들으며 아이가 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날은 마녀 어떤 날은 새엄마 어떤 날은 왕자 어떤 날은 요정 할머니...


이 루틴이 동시에 돌아간다. 


내 정리 욕구 충족시키랴, 아이 요구사항 들어주며 저녁 준비하랴, 분주하게 저글링을 하다 보니 박자가 어긋나 아이의 심기를 건드릴 때가 많다. 엄마! 이것 좀 해줘! 분명히 말했는데, 나는 아이의 외침을 듣고도 눈앞의 머리카락 치우고 책상 위에 넌줄거리는 핸드폰 충전기 돌돌 말아 멀티탭 정리함에 쑤셔 넣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정리하고 있으면 뒤에선 아이가 분노의 백덤블링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도 헤드스핀을 하고 싶어진다. 


"일에는 순서가 있어" 

"엄마는 정리를 해야 해"

"엄마한테 소리 지르지 마"

"말 예쁘게 안 하면 엄마 00이 엄마 안 할 거야"

"엄마 집 나간다?"


정리를 해야 하는데, 정리를 해야 하는데, 아이가 내 뒤에 딱 붙어 보채면 나도 모르게 해선 안 될 말들이 두다다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거 누가 관찰 카메라로 찍어서 오은영 박사님께 제보하면 박사님이 이러실 거야 


"정리 강박이 아이의 정서를 망쳐요"

"정리 좀 안 하면 어때요, 놓으세요"

"누구 엄마 안 할 거야, 집 나간다, 이런 말이 얼마나 애한테 불안감을 심어주는데요"


근데 어쩔 수 없어요 박사님...

저는 정리를 해야 맘이 편하고 바닥에 머리카락이 없어야 다른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어릴 땐 정리하라는 엄마 말이 젤 듣기 싫었고 서른 살에 독립하기 이전까지도 방을 너무 더럽게 써서 맨날 잔소리 듣고 살았는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모든 게 가지런히, 언제나 같은 상태로 정리돼 있어야만 심신의 안정이 찾아온다. 이불도 반듯반듯하게, 아이 그림책도 반듯반듯하게. 남편이 베란다에 빨래 너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아 저거 아닌데' 싶어서 표정이 굳어진다. 결국 다시 손을 댄다. 하루 만에 치워버릴 빨래도 어깨선이 옷걸이에 딱 맞게, 깃 흐트러지지 않게, 가지런히 정렬시키며 희열을 느끼는 나 자신이 변태 같다. 


정작 위생 관념은 별로 없어서 설거지는 엄청 대충 하면서. 정리 강박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어쩌다 이게 내 삶을 이렇게 지배하게 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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