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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Sep 10. 2019

모유왕의 속사정  

나는 술 때문에 단유를 했다.


출산 후 60여 일이 지나자 몸이 많이 회복됐고, 임신 기간 못 누렸던 음주를 다시 시작했다. 가끔 먹고 짜내버리는 건 상관없는데 술을 다시 시작하니 매일 마시는 게 일상이 됐다. 임신 전처럼.


출산 후 처음 마신 맥주는 별 맛이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 것 같았다. 세 번째 마신 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그래 이거야 이 청량감! 이후엔 막걸리에 빠졌다. 막걸리는 진짜 맛있다. 밥도 되고 술도 되는 최고의 음식 같다. 한동안 막걸리에 빠져 살았다.

아재의 술상 #장수막걸리 #총각무김치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젖을 짜서 버리는 게 일이었다. 이럴 거 단유를 하고 제대로 마시자 싶었다. 술 때문에 단유라니, 술 마시는 사람 극도로 혐오하는 엄마가 아시면 뒷목 잡을 일이었다.


단유를 앞두고 죄책감을 덜기 위해 지난날을 돌아봤다. 나는 임신과 출산 미션을 잘 수행했고, 모유왕 소리 들을 만큼 젖이 펑펑 나와서 초유는 충분히 먹였으며, 우리 아기는 분유도 잘 먹었다. 내 행복을 위해 젖을 끊어도 됐다. 잘 나오는 모유 짜서 버릴 때의 죄책감 보단 아예 젖을 끊고 술을 마시는 게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았다.


3일간 젖을 짜지 않았더니 가슴이 바주카포처럼 높고 단단하게 솟아 올랐다. 오후에 아이를 얹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쏟아지면서 엄청난 죄책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술 때문에 단유라니... 단지 술 때문에... 나는 엄마 자격이 있는 걸까? 잘 나오는 모유를 술 때문에 끊는다니?


아이가 오물거리며 젖을 먹는 광경이 갑자기 눈에 선하고, 땀에 흠뻑 젖은 뒤통수를 어루만질 때의 감촉도 생각나고, 매일 새벽 유축기와 맞이하는 하루의 시작이 왠지 그리울 것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지겹다며, 이제 힘들다며! 원래 웰컴 드링크로 끝내기로 했던 모유수유인데, 의외로 너무 잘 나온 건 행운이었지, 이젠 그만 하자.


단유 마사지 예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백일까지만 더 할래!! 눈물샘이 펑하고 터졌다. 죄책감과 싸우다 터진 울음이었다. 놀란 남편은 잘 생각했다고, 백일까지만 힘내서 더해 보자고 했다. 삼 일간 고인 젖을 아이에게 물렸다. 아이는 젖을 쭉쭉 빨았다. 몸과 마음 모두 시원해졌다.


정신은 몸을 지배한다고 한다. 단유 한다고 했다가 다시 번복한 해프닝 이후 나는 말로만 듣던 자연 단유를 경험했다. 다음 날 새벽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데 가슴이 가벼웠다. 아이는 평온하게 젖을 먹고 잠들었다. 엄마 찌찌 안녕~하고 이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이후로 전만큼 젖이 돌지 않았고, 단유에 성공했다.


주변에서 출산드라라고 부를 정도로 순산을 했고, 친정엄마 체질을 닮아 모유도 많았다. 조리원에서 유전 터지듯 젖이 콸콸 쏟아지자 조리원 선생님들은 박수를 쳤고, 젖 많은 산모라는 칭찬을 들으니 으쓱했다. 내 몸의 기능이 이렇게나 훌륭하다니! 초등학교 때 계주를 잘 뛰었을 때처럼 기분이 좋았다. 잘 나오는 젖을 굳이 빨리 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조리원과 집에서 참 열심히도 유축과 직수를 했었다. 하루 7~8번의 수유 타임을 맞춰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행복했었다.


새벽에 젖이 부풀어 딴딴해지고 뜨거워진 가슴을 어루만지며 유축기로 젖을 빼내던 일

아이가 세차게 젖을 빨아줄 때의 시원함

젖을 문 아이가 스르르 잠들 때의 그 표정

힘들고 고달프지만 추억으로 각인될 일이다.


모유수유는 일생에 한 번이면 족할 귀하디 귀한 경험이었다. 만 19세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 숙취가 정말 심한 날 외엔 손에 꼽는 알코올 의존증 에미가 그래도 에미랍시고 아이를 위해 애쓴 기간이었다.


나의 사랑♥︎ 술꾼들의 최애맥주 #카스병맥


맥주 없는 육아, 술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다. 육퇴 후 맥주 한 캔은 지치고 힘든 나를 위해 주는 상이다. 쉽게 불안과 걱정에 빠져드는 나에게 쾌락과 긍정의 신 디오니소스가 강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끔은 밖에서 마시는 술이 그립기도 하지만 장소가 뭐 중요하랴. 냉장고에 그득한 맥주를 보면 마음이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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