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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Aug 14. 2019

더 이상 힙하지 않아도 돼

육아는 참 재밌는 것 같아. 지난 주말 아이를 씻기다 불쑥 나온 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는 육아가 재밌다니!? 그런데 진심이었다. 그 짧은 순간 육아가 정말 재밌다고 느꼈다. 남편은 자상하고 아이는 사랑스럽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육아가 힘들지 않았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행복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중2병 발발할 시점에 이 슬픈 진리를 깨달았다. 학교는 매일 즐겁지 않았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게 싫을 때도 많았다. 총체적으로 보면 괴로운 게 인생이었다. 회사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무거운 몸 일으켜 출근해야 하는 게 어찌나 비극인지. 행복은 가끔만 찾아오는 거였다.


최근 본 영화 <꿈의 제인>의 대사. 슬프지만 공감했다.


'행복'과 '안 행복'의 총량을 비교했을 때 후자가 우세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육아를 하면서 힘들고 피곤하고 짜증 날 때도 많다. 그래도 행복한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한 게 육아 같다. 찰나의 순간 엄청난 행복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와서 누적된 피로와 불만을 한 방에 날려준다. 아이를 낳기 전보다 후가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아이를 키우면서 스스로를 가두었던 강박도 많이 사라졌다. 예전엔 타인의 시선을 정말 많이 의식했다. 누가 봐도 일 잘하고 자기 관리 철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일상에서 느끼는 긴장과 불안이 크다는 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게 다 알게 뭐냐...<절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하한선을 정해놓고 그 선만 넘지 않으려 한다. 여성스러움을 포기하지 말 것. 일 못해서 남에게 피해 주지 말 것. 이 두 가지가 넘어선 안 될 선이다.  워킹맘의 삶이 힘들지만 그 힘듦에 함몰돼 주변에 피해를 주고 싶진 않다. 매일 머리 감고 화장하고 어제와 다른 옷을 입고 출근하려 애쓴다. 일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도 일 대충 한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예전엔 유행을 놓칠까 봐 불안했었다. 원래도 트렌디한 편은 아녔지만 트렌드를 너무 모르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힙하다는 건 대충이라도 알고 경험해봐야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기준도 확 낮아졌다. 힙한 걸 몰라도 창피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내가 뒤쳐진 사람이라는 생각도 안 든다.


이런 것도 육아의 장점 아닐까. 욕심을 내려놓으면서 관대해지고 느긋해졌다. 당근마켓에서 산 5천 원짜리 티셔츠를 입어도, 사람들 농담에 리액션을 잘 못해도, 거창한 삶의 계획이나 목표가 없어도, 나는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 괜찮은 여성이라고 느낀다.


미울 때도 많지만 언제나 내 편인 남편과, 남편을 꼭 닮은 아이 덕분이다. 두 사람 덕분에 내 삶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걸 느낀다. '안 행복'의 비중이 커도 괜찮다. 행복할 때만큼은 정말 행복하니까. 더 이상 힙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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