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역동적인 것들이 멈춘 지금, 우리는 집 안에서 또는 실내의 정적인 공간에서 온라인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 영상통화, 화상 회의, 온라인 강의 등 우리는 이미 충분히 발전된 통신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까지는 굳이 이런 기술을 활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재난적 상황이지만, 덕분에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고, 습관을 점검해볼 수 있으며 지난 나의 생활에 대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상황이 하루빨리 호전되어 다시금 사람들과 또는 어떤 익숙했던 공간들과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오히려 이런 온라인 세상에서 사는 것이 오프라인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를 더욱 부추기는 셈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우리가 미술관에 굳이 가는 이유에 대해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잠깐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불과 2주 정도 전까지만 해도 학교 도서관 자료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대출하고 싶은 책을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예약도서를 대출하듯 데스크에서 받을 수 있었다. 자료실 출입이 가능해지자마자 나는 괜히 자료실을 찾았다. 굳이 빌릴 책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읽고 싶은 분야에 가서 여러 책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단순히 어떤 하나의 주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곳에 가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보고 싶은 그림을 구글에 검색하면 웬만하면 다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유명한 그림의 경우 고해상도로 확대해가며 볼 수도 있다. 유튜브에 검색하면 유명한 그림에 대한 설명과 박물관 탐방기 등 이제는 생생한 경험을 기록해 놓은 다양한 채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술관에 간다. 실물을 보러 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 실물만을 보러 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Secession 빈 분리파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빈 분리파 미술관(Secession 제체시온)이 소장하고 있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 Beethoven Frieze, 1902>라는 작품이 있다. 1897년 4월 3일에 구스타브 클림트, 요셉 호프만 등을 중심으로 기존 미술계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모임인 ‘분리파’을 결성하게 되고, 이에 맞는 전시관을 만든 것이 제체시온 Secession이다. 본 미술관 또한 당시 매우 파격적인 건축 디자인을 선보이게 되는데, 이는 클림트의 작품이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세 벽면에 걸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작품은 높은 천장 바로 아래 위치되어 고개를 거의 90도로 꺾어야만 볼 수 있고, 관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묘사를 보기에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보는 편이 낫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궁금증을 가지고 이곳에 방문한다. 여기서는 본 그림의 모티브가 되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부분을 들을 수 있도록 개별 헤드셋을 제공한다. 관람객들은 헤드셋을 하나씩 끼고 혹시 발견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감각에 집중하게 된다.
Gustav Climt, Beethoven Frieze, 1902 일부
솔직히 말해서 <베토벤 프리즈>를 감상하며 생각보다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오히려 본 상설 전시 외에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temporary exhibition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분명 <베토벤 프리즈>의 실물을 보기 전까지는 실물을 보기 위해 갔던 것이 분명하다. 설령 실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보기 전까지 아직 판단할 수 없기에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간다. 제체시온은 관람객들에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오디오라는 매체를 추가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심지어 너무 높이 있어 제대로 보기 어려운 <베토벤 프리즈>라는 작품에 음악을 추가하여 본 작품에 대한 공감각적 경험을 유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유명한 작품의 지극히 대표적인 예시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미술관에 방문할 때 단순히 특정한 작품만을 보러 가지는 않는다. 그 작품들이 배치된 구도와 동선, 배치된 이유와 배경 등 해당 공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 몰입감과 아이디어에 접근하는 것이다.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은 시각이겠지만, 시각적 경험을 둘러싼 해당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청각, 촉각, 후각 그리고 분위기와 작품 전후에 배치된 다른 감각들이 한 데 어우러져 “어떤 공간에서 어떤 작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본 그림 앞에 오래 머무르게 되는데, 이 시간을 통해 어떤 의미를 더 찾아내려고도 하고 그 자체의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반대의 예시로,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생각해보자. 필자는 본 작품을 실물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많은 프랑스 여행객들은 루브르에 가고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본다. 그러나 혹자의 경험에 따르면,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인 나머지 앞에 경비원이 관람객들을 줄 세우고 포토타임을 잠깐 준 다음에 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 많은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실물을 본 이후에 무엇이 남았을까? 인증샷 정도 남았을 것이다. 사실 이는 “감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어떠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공감각적 경험을 기대한 사람은 매우 실망했을 것이고, 인증샷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은 그런대로 만족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외 매우 유명한 미술관에 대한 예시를 들었지만, 이는 어떤 미술관이든 마찬가지이다. 상설전시나 기획전시 모두 관람객들에게 단순한 작품을 통한 시각적 경험만을 제공하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관람객들 또한 작품을 보겠다는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미술관 또는 갤러리 또는 대안공간 모두 해당 장소만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작품이 관람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장소성을 모두 배제하고 작품 그 자체만을 감상시키기 위한 장치인 ‘화이트 큐브’의 아이디어와 반대되는 현상이다. 어쩌면 화이트 큐브 또한 ‘화이트 큐브’라는 장소성이 관람의 일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예술’은 장소나 맥락이 완전히 배제된 채 그 자체로서 감상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자 작품이 전시된 실제 공간을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무엇을 느끼려고 하는지, 또는 느낄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여러 감각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모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