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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Apr 26. 2020

미술을 번역하기

[E앙데팡당X아트렉처/모그]

  예술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공감의 “언어”로 기능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청각과 시각에 호소하는 음악, 미술이 대표적일 것이다.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지만, 예술의 언어는 일상 언어의 차원을 넘어선 또 다른 대안적 소통과 공감 방식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미술의 경우,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에 일상적 언어를 매개하지 않고 소통이 가능할까? 현대 미술의 경우, 작가의 사유와 세계를 작가만의 언어로 구현해 낸 개념으로 가득 찬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이 대안적 ‘언어’가 될 수 있는 이유로 표현과 소통, 공감 등의 기능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만의 언어로 구성된 시각예술의 다양한 표현방식과 내용은 일상 언어처럼 일정한 규칙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소통과 공감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일상 언어로의 “번역”에 기댈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언어를 일상적 의미의 언어를 포함하여 어떠한 형식으로 세상을 읽고 표현하고 소통하는 모든 몸짓을 '언어'로 보고 “번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려고 한다. 번역은 세계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말이다.

이는 나에게 의미없는 조각난 그림들인가? 또는 내가 분석하고 싶은 대상인가?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심리상태는 꽤 차갑다.

  우리가 음악과 비교해서 시각예술인 미술을 일상 언어로의 번역하는데 익숙한 이유는 ‘시각’에 호소하는 장르적 특성 때문이다. 혹자는 시각에 호소하는 미술은 차가운 예술, 그리고 청각에 호소하는 음악은 따듯한 예술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눈으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만큼, 시각을 주로 하는 조형적 언어들은 수용자에게 또 하나의 분석의 대상이 되고 이성의 눈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또한 일상에서 친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기 쉽다. 가령 위에 있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어떤 글자들이라는 정보를 주지만, 낯선 언어라는 점에서 이는 우리에게 언어로서 능동적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우리는 이를 자연스럽게 하나의 시각적 대상으로 대상화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저 이미지는 헝가리어이며 헝가리 국립 미술관에서 작품 설명을 찍은 것이다.)그만큼 미술의 조형적 언어는 작가의 세계를 구현해냈다는 것 이상으로 추가적인 설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예술이 단순히 표현만을 위한 것이라면, 창작자의 손을 떠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창작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소통과 공감이라는 기능이 추가될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은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되어야만 하는 의무가 생긴다. 이는 창작자가 할 수도 있고, 비평가가 할 수도 있으며, 일반 수용자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일차적으로 작가 자신이 작품의 조형적 언어에서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있겠다. 이는 최소한의 소통을 시작하기 위한 질문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일기의 형태가 될 수도 있으며, 개인적인 기록일 수도 있고, 인터뷰에서 이루어지는 담화의 형태일 수도 있다. 또한 작가가 일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은 작품의 내용을 담지 않아도 될 것이며, 작업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고, 고의적으로 감출 수도 있다. 이를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오히려 “주석”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만의 조형적 표현방식을 소통 가능한 일상 언어로 재연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1차적 번역 과정이라고 가정해보려고 한다.


  다음으로, 작가 또는 작품이 개인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어떤 플랫폼을 경유해 등장할 때 한 번 더 번역이 요구된다. 현대에는 물리적인 전시공간이 아니더라도 온라인 상에서 작품을 등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 SNS를 통해서 대중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SNS라고 하더라도 많은 다수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획되어야 한다. 기획의 과정에서 작가가 아닌 매개자가 개입한다. 이 매개자는 사회의 언어로 풀이를 해주어야 한다. 사회가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특히 현대적 관점에서(포스트모던의 관점) 예술은 맥락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읽힐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Fine Art, 순수 예술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결국 예술을 둘러싼 사회를 보게 한다. 또한 작품마다 작가마다 사회마다 비슷한 문제의식이라 하더라도 이를 표현해내는 방식, 승화의 방식은 모두 다르다. 지역마다 예술적 감수성도 다르고 미감도 다르다.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른 이 미적 감각을 소통 가능한 사회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도 현대미술에서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이는 작가가 구현해낸 세계에 역사성과 사회성을 입히고 오히려 내용을 더 정교하고 풍부하게 해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이 등장한다. 내용이 풍부해질수록 소통 가능성은 줄어드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쉬운 언어의 힘을 잊는 듯하다. 쉬운 언어에도 단계가 있겠지만, 예술의 소통 범위에 누락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Peter Saul, Crucifixion, 1964 / 프랑스 툴루즈 Les Abattoir 2020.1 방문한 기획전시

  전시관에 가면 작품 옆에 붙어있는 해설은 성인을 위한 것이다. 글이 배치된 높이부터 성인의 눈높이에 형성되어 있고, 어휘나 문장 구조 또한 성인에 맞춰져 있다. 이는 매우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 필요한 게 더 있다. 아동의 높이에서 아동의 언어로 쓰인 글이 필요하다. 아동을 위해 미술의 언어를 한 번 더 번역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가적인 번역 과정이 과연 아동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가 노약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의 예로, 프랑스 소도시에 있는 미술관에 갔을 때 일반적인 설명문 아래 아동을 위한 설명문이 있었다. 실제로 그 공간에는 아동, 청소년이 매우 많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서로의 생각을 자신들만의 언어로 공유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 쉬운 버전의 설명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나랑 내 친구였다. 프랑스 친구 또한 그 쉬운 설명을 읽으면서 나에게 영어로 번역을 해주었다. 어쩌면 쉬운 문장 구조와 어휘로 구성된 설명문은 외국인에게도 반가운 일일 것이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위에 제시된 Peter Saul의 작품의 "불건전성"을 어떻게 아동의 언어로 번역을 하냐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작품의 외형적 특징과 선정성이 아닌 Peter Saul의 예술관과 그의 팝아트가 가지는 예술사적 의미와 특징을 기술하고 있다. 내용의 적절성은 각자 판단에 맡긴다.


2020.01.14에 프랑스의 툴루즈 현대미술관  Les Abattoir 에서 찍은 사진. 아래에 아동을 위한 쉬운 설명이 곁들여져있다.

  우리는 종종 너무나 많은 설명문에 정보를 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무엇이 핵심인지 모르고 또 어떤 설명은 감상자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다. 또한 글자에 압도되어 작품을 보지 못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는 일상 언어를 넘어 이제는 전문적인 언어의 영역이 된 미술의 세계를 보여준다. 물론 작품이 갖는 사회적 함의와 문제 제기 방식은 일상의 차원 이상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 제기 방식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일상적 삶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술의 전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미술과 일상은 분리된다. 미술과 일상을 유기적으로 관계시키기 위해서는 접근 가능한 언어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모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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