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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May 18. 2020

가장 순수한 조형 언어, 추상

[아트렉처XE앙데팡당/보배]

 파울 클레에 따르면 회화의 형식적 수단에는 선(크기), 명암(무게), 그리고 색(질)이 있다. 이 세 요소는 한글에서의 자·모음과도 같은, 조형언어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추상화는 이 조형 요소를 가장 전면에 내세운 회화이다. 따라서 추상화는 회화를 새로운 언어로 사용하려는 시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재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추가되면서 필자는 언어로서의 추상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가졌다.
 대상은 언어 기호 혹은 이미지로 이름을 갖게 되거나 재생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필자가 ‘보배’라고 명명되었기 때문에 필자를 음성/문자로 지칭할 수 있고, 그림이 보배를 닮았기에 초상화의 주인공이 보배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구상 회화의 경우 이미지를 언어 기호로 변환할 수 있기 때문에 추상 회화에 비해 기호의 개입 여지가 더 크다. 그림을 보고 무엇을 그렸다고 인식하거나 연상할 수 있다. 이는 곧 대상에 대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덧붙여 구상 회화라도 재현의 원리가 얼마나 잘 적용되었는가-원본이 되는 대상과 대상을 모사한 그림이 얼마나 유사한가-에 따라 그것을 언어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가 좋은 예이다. 정밀하고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우리는 의심 없이 아래 정물화에 화가가 유리잔과 접시, 햄, 복숭아 따위를 그렸음을 알 수 있고 이를 제목과 병치하며 우리의 추측이 화가의 의도와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1). 사실적인 재현을 탈피하려고 했던 입체파와 야수파에 이르러 무엇을 그렸는지는 점점 불확실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사람 형상이구나’와 같은 연상 작용은 발생한다(그림2). 연상 작용에 따라 언어 기호를 이용해 그림에서 대상을 찾고 이름 붙이기는 여전히 가능한 것이다. 그리려는 것이 현실에서 정신으로, 재현에서 개념으로 이동하면 할수록 대상의 형태에는 점점 더 많은 여지가 생긴다. 이에 따라 연상 작용도 다양해질 수 있고, 보는 이에 따라 그림에 대한 해석과 이름 붙이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림1) 피터 클라스, <아침식사정물breakfast with ham>, 1647.
(그림2)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1946.

추상 회화의 목적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화에는 인식 가능한 대상이 없고 형식 요소들만이 남아 있다. 회화에 대상이 사라지면 화폭 안에는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한 어떤 형태도 남지 않는다. 오직 점/선/면/색 등의 형식 요소만을 ‘점/선/면/색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요소가 이루는 화면은 언어 기호로는 읽을 수가 없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 몬드리안이 직선과 사각형을 통해 그리려고 했던 것이 뉴욕의 도로와 고층 건물들이었음을 그림만으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듯 말이다. 이마저 문자 언어 형태의 제목을 통해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한편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의 목적이 ‘검은 사각형을 그리는 것’으로, 대상의 완전한 제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화면을 설명할 수 있는 상징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화면 자체를 새로운 언어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추상은 가장 순수한 조형 언어이다. 평면 위에는 조형 요소만이 남았고 동시에 대상을 지칭할  있는 재현의 세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설명과 해설  언어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한다면 어떠한 무의식적 연상 작용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943.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



참고문헌

미셸 푸코, 김현 역,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고려대학교출판부, 2010.
진 로버트슨 외, 문혜진 역, 『테마 현대미술 노트』, 두성북스, 2011.
파울 클레, 박순철 역, 『현대미술을 찾아서』, 열화당,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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