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앙데팡당X아트렉쳐/새무]
몇 달 전에 넷플릭스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이 리스트업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만 틀어박혔던 터라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고전작품들을 일명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반전과 평화, 자연과 인간 등의 다양한 주제가 녹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기발한 상상력뿐만아니라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순수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와 적절한 OST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딘가 아련하고,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느낌, 지난날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주인공 키키가 유럽풍 해안도시의 하늘을 나는 장면은 이러한 점에서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알 수 없는 향수를 자극하는 시각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본 고장인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있지만,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유럽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도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한 <마녀배달부 키키>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고풍스러운 유럽의 건축물들은 낭만과 향수를 자극한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비행기나 기계적인 요소가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한다. 감독이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에는 전투기, 비행기, 비행선 등의 물체가 등장한다. 비행기 외에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의 성은 증기를 내뿜는 기계적인 고철덩어리로 등장한다. 얼기설기 맞물린 톱니바퀴, 뜨겁게 달궈지는 엔진과 뿜어지는 증기의 이미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마할아범의 보일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기계적인 요소를 스팀펑크(Steampunk)라고 부른다. 스팀펑크란, SF의 하위 장르로, 18~19세기 산업혁명 시기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기술이 발전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 장르를 말한다. 스팀펑크는 20세기 전기동력이나 내연기관을 기반으로 산업 발전을 이뤄낸 현실의 역사와 달리,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재나 미래를 묘사하는 일종의 대체 역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스팀펑크는 산업혁명에 대한 역동성을 보여주며, 당대에 대한 낭만과 향수가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기계 문명이 가져온 현대 도시의 운동성과 속도감을 찬양하던 20세기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스팀펑크의 배경이 되는 18~19세기 산업혁명 시기는 빅토리아 시대로, 유럽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황금기를 맞이했었다. 이 시대를 일컬어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도 한다. 벨 에포크는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며, 일시적으로 지난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말한다. 역사적으로는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대를 뜻한다.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스팀펑크 계열 작품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과연 모두에게 좋은 시절이었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벨 에포크 시대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소수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만 화려했던 시절이고, 그들에게 지배를 당했던 대다수의 피지배 국가들에게는 약탈과 수난의 시절이었다. 때문에 벨 에포크 시대는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이유이기 때문일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팀펑크는 스토리텔링적 측면에서 디스토피아적, 또는 아포칼립스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붉은 돼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스팀펑크 장르는 산업사회적 상상력과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낭만이 녹아있지만, 동시에 과학문명과 기계, 그리고 전쟁에 대한 반성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