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9년 3월 1일이 독립운동의 시초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대부분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올해 유독 역사를 기억하는 기획 전시가 많이 열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올해는 심전 안중식이 서거한 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심전 안중식이라는 이름으로 올해 우리가 회고할 수 있는 역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역사를 회고하고 의미화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역사 안에는 글과 그림이 있다. 100년이 지난 현재, 과거를 바라보는 눈이 어떠한지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들어가 보자.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라는 이름으로 열린 본 전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국내 서화가들의 작품 활동 및 사회 운동의 흐름을 시기별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 1902년 고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하며 마지막 궁중 화원을 이끌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을 주축으로 조선의 아카데미 미술의 계를 이어가고자 했던 남성 문인 서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선 서화는 말 그리고 글과 그림이다. 동양화의 특징은 작품에서 글과 그림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제발'을 이해하면 된다. 제발은 화폭 안에 그림과 함께 쓰여 있는 글인데, 이는 그림을 그린 화가와 글을 쓴 사람과 언제나 같지 않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다른 사람이 화폭에 첨언을 하는 것이 그림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 서양화와 다른 지점이다. 다른 사람이 그림에 대한 평을 적기도 하고, 그림을 그린 서화가의 재주나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며, 죽은 후에 고인을 회고하며 적기도 한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글이 쓰인 시기가 다를 수도 있으며 이는 동양화를 이해하는 데에 전혀 이상한 점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그림은 제발의 개수가 여러 개일 수도 있는데, 이는 그 그림의 가치를 더 높여주기도 한다. 누가 제발을 달았는지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듯 근대 서화가들의 글과 그림을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회화의 조형적 가치와 그 역사성만을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과 그림의 맥락성, 글을 통해 나타난 당시의 시대상과 서화가들의 이야기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미술사 이상의 사회사적인 측면을 볼 수도 있다.
황철, 적벽의 뱃놀이. 1916/ 김진우, 난초와 대나무(일본 망명 직전, 독립 의지를 나타내는 날카로운 필치)
조선의 궁중 화원으로부터 명맥이 이어지는 조선의 아카데미계는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라는 피해자의 역사 안에서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이 아니라 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적이고 사회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카데미 미술이라고 했을 때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해야 할 것 같지만, 고종의 어진을 그린 사람으로서 눈 앞에서 국가의 몰락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들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나 붓으로 글과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회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부조리를 목격하면서 표현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양반 남성들에게 국가의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잡지와 신문을 창간한다든지, 신문에 최초의 삽화를 그려 넣고 만평을 삽입한다든지, 신문에 소설을 발행한다든지, 소설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든지 이런 사소하지만 대중적인 힘이 있는 활동에서부터, 국내 서화가들의 양성과 참여를 독려하는 교육활동 및 전시회, 공모전 개최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이는 서양의 아카데미 미술계의 보수적인 행보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데, 신문의 삽화를 미술로 볼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순수미술"을 구분 지으려고 했던 배경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의 서화가들에게 '순수미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읽혔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현실 속에서 이들이 실용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자신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했던 활동들과 다르게 문학적이며 서화 그 자체를 위해 붓을 잡았을 때를 그리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대한민보>에 삽화 또는 만평을 연재
근대 서화가이자 미술계의 계승과 사회 참여를 주도했던 심전 안중식의 작품이다. 경복궁과 백악산, 그리고 해태상을 정면에 배치하여 나라가 건재했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일제에 의해 박람회장으로 격의가 훼손된 경복궁의 기개를 되살리고자 '백악춘효'라는 이름으로 백악의 봄을 다시금 깨우고 싶은 의지를 담아내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본 전시의 대표작품이자 전시의 주제를 아우르는, '봄 새벽을 깨우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식, 백악의 봄날 새벽, 1915 여름과 가을
그러나 이러한 조선 미술계의 활동이 시대적으로 유의미하고 도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수요가 높아지고 이에 공모전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다양하고 독창적인 작품들도 있었을 것이다. 서화가 양성 교습소에서는 오전반, 오후반, 남성반, 여성반 이렇게 나누어져 교습을 진행했는데, 여성반은 거의 기생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난초를 그리는 기생'이 신문에 대서특필이 될 정도로 당시 남성 사회에서 여성이 서화를 그린다는 것에 어떠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다. 남성의 영역에 여성이 들어오는 것, 똑똑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배타적이면서 호기심 또는 의구심 가득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더군나 남성 사회에서 성적 대상화 그 자체이면서 유흥의 영역에 있는 여성(기생)이 남성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매력이었을 것이다. 마치 논개의 문인적 역량을 지금까지도 과거 여성의 특별한 재주로 평가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조선 후기에 '신여성을 첩으로 둔 남성'들이 많았다는 점, 또한 기득권 남성들이 선망했던 똑똑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해하는 어떤 여성에흥미를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적 대상이자 가부장제 안에서 자신을 보조하고 자신의 즐거움에 기여해야 하는 위치 안에서만 똑똑함을 허용했던 오만하고 이중적인 태도는 시대를 막론하고 맥락에 맞게 변용되어 나타난다. 당시에 여성이 서화의 영역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거 조선에 여성 문인화가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그들의 활동 또는 행위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사소화되어 여성을 지우는 일반적인 역사의식의 반영을 감안하더라도) 기생이 서화를 그리는 것이 하나의 오락거리이자 대중들의 호기심 정도로만 비치는 것이다. 마치 현대에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돌 산업에 여성이 많다는 이유를 드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여성의 행위는 대의명분의 일이 아닌 작은 일, 부분적인 일, 오락거리 정도의 것으로 축소시키는 시각이 본 전시를 통해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또다시 볼 수 있다.
필자가 갑자기 확장된 논의를 전개하는 것 같지만, 아래 보이는 그림을 통해 더 생각해보자.
최우석, 승려복을 입은 여인, 1920년대
위 그림은 분명 승려복이라는 특징을 통해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승려복을 입은 여성이라는 점은 이 대상이 비구니이거나 여성 동자승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면 중앙에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모습은 종교적인 숭고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뒤에 배경에 있는 무녀들은 불교가 아닌 무속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승려복을 입은 여인과 두 무녀를 한 화폭에 배치하면서 종교적인 엄숙함이나 어떠한 도덕성 또는 정신적 가치를 담아내려고 하지 않고,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로 인물을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승려복을 입었다는 것으로 이 화폭에 여성 종교인의 모습을 담았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대상화된 여성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담고 있다. 승려복을 입은 여성을 통해 어떠한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것일까.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출품된 공모작이며, 작가인 최우석은 여러 차례 입상한 역사인물화가였다. 본 전시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 '불교를 통해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신화적인 요소를 통해 신비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본 미술에서 유행하였던 것'으로, 일본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거 최우석이 이 그림을 공모할 때 사용한 언어 그대로, 비판적 해석을 배제한 채 옮겨놓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래 그림은 서양 미술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역사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그림들이다. 왼쪽의 그림은 '비너스'라는 말로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누드 여성에게 현실의 여성이 아닌 신화 속 여성이라고 명명하면서 현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반면 오른쪽의 그림은 동일한 여성 누드 그림이나, 마네는 '올랭피아'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 유명한 성노동자의 이름을 그림 속 여성에게 붙여주었다. 이는 너무 외설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아카데미에서 탈락시켰으나, 결국 성매매를 했던 남성들의 죄책감과 위선적 면모를 폭로했다는 스스로의 죄책감으로인해 현실 여성의 이름을 가진 누드화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두 그림을 통해 (물론 이를 보여주는 그림은 끝없이 찾을 수 있다) 신화 속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그림들의 전통 안에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하는 위선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미술의 국제적인 영향 안에서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여성을 표현한 그림이라는 해석을 우리의 눈으로 어떻게 심화시키고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좌,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 우, 마네, <올랭피아>, 1863
역사를 회고하고 무언가를 기억하는 작업은 언제나 중요하다. 또한 그동안 기억되지 못했던 역사를 발굴하고 기억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잘못 기억되었던 역사,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던 역사 등 과거의 부족함을 현재의 눈으로 다시금 재해석하고 그 부족함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는 태도까지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역사적 태도이다. 기념비적 역사를 기리는 것, 아픈 역사를 추모하는 것 외에도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과제는 무한하다. 그 안에 미술사는 미술을 통해, 시각적 표현을 통해 역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의 시선을 가끔은 날카롭게 만들 필요가 있는데, 본 전시에서는 단 한 부분, 나에게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20190508, 모그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