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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Nov 25. 2020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초현실주의

[그루잠03]

  나는 미술의 모든 사조를 통틀어 초현실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현대미술의 한 사조라는 점에서 소재가 다양하고 작품에 대한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구상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초현실주의 미술이 보여주는 창의성 때문이다. 그 중 데페이즈망 기법과 연통관 개념이 적용된 작품을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토마티즘 기법보다는 데페이즈망 기법에 더 관심을 갖고 이를 활용한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

  패션에 초현실주의를 처음 접목하고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용한 의상들로 전세계 패션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엘사 스키아파렐리이다. 1930년대는 세 여성 패션 디자이너 마들렌 비오네, 엘사 스키아파렐리, 가브리엘 샤넬이 패션계를 이끌었으며 비오네의 바이어스 재단 방식과 스키아파렐리의 초현실주의 디자인은 이들 뒤에 등장한 장 폴 고티에, 알렉산더 맥퀸 등 이른바 천재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들의 디자인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 중 그에게 데뷔와 동시에 큰 인기를 가져다 준 것은 트롱프뢰유 스웨터이다. 트롱브뢰유(trompe-l’oeile)는 ‘눈속임, 착각을 일으킴’이라는 뜻으로 실물과 같을 정도의 철저한 사실적 묘사를 말한다. 트롱프뢰유 스웨터는 1927년 니트웨어 컬렉션에서 검정 니트에 리본이 매여있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는 패턴이 짜인 스웨터로 그의 데뷔 작품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디자인인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우리가 익숙해질 만큼 현대패션의 오뜨꾸뛰르와 기성복 모두에서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이 지금까지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현재 톰브라운, 샤넬, 모키노, 생 로랑 등 대부분의 브랜드에서 스키아파렐리의 트롱프뢰유 아이디어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bewknot sweater>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초현실주의 작가들과도 협업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살바도르 달리와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스키아파렐리는 트롱프뢰유 스웨터로 큰 명성을 얻은 후 트롱프뢰유 기법을 디자인에 자주 적용하였다. 1938년 circus collection에서 선보인 이브닝 드레스인 tear dress에서는 피부가 찢어진 듯한 시각적 착각을 일으키는 트롱프뢰유  패턴 원단을 사용하였다. 원단의 패턴은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그림을 프린트한 것으로 ‘벗겨진 피부’라는 공격적인 디자인은 20세기 펑크룩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달리와의 협업을 통해 주머니가 서랍처럼 달린 desk suit, 구두의 본래 쓰임을 바꾸어 모자로 만든 shoe hat, 월리스 심슨이 즐겨 입은 lobster dress 등 유래 없는 독특함을 보여주는 스키아파렐리의 대표 작품들이 제작된다. 살바도르 달리 이외에도 장 콕토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협업하거나 스스로 두 얼굴이 꽃병 모양을 만들어내거나 등 부분에 끈을 달아놓은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트롱프뢰유 기법을 옷 뿐만 아니라 액세서리에도 적용하여 여러 재미있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tear dress>

  앞서 소개한 desk suit, shoe hat 등의 스키아파렐리의 다양한 작품에는 일상적인 사물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에 두거나 크기를 왜곡시키고 논리를 뒤집는 기법인 데페이즈망 역시 적용되었다. 그 중 장갑에 손톱과 장갑을 결합한 디자인의 장갑은 작품을 보자마자 발과 신발을 결합한 르네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을 떠올리게 하였다. 또한 재킷의 앞뒤를 바꾸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앞과 뒤의 구분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backward suit>는 패션에 적용된 데페이즈망 기법의 대표적 예시로 여겨지며, 80년대에 칼 라거펠트나 장 까스텔 바작  등의 디자이너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르네 마그리트 <붉은 모델>, 엘사 스키아파렐리 <손톱이 있는 장갑>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이러한 초현실주의 기법을 디자인에 적용한 사례 외에도 당시 공업용 재료라고 여겨지던 지퍼를 최초로 드레스 등에 부착하거나 새로운 섬유를 사용하여 실험적인 원단을 선보이는 등 우리가 지금 당장 입고 있는 옷에도 수많은 영향을 미친 시도를 하였다. 또한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음악과 무대장치 등 여러 요소가 합쳐진 복합적인 예술 요소를 포함하는 패션쇼를 처음 시작한 것 역시 스키아파렐리였다. 1930년대 가브리엘 샤넬과 라이벌 구도를 이루던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적응하지 못하였고 대중은 화려하고 극적인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이 아닌 실용적이고 단순한 샤넬의 디자인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현재 브랜드 샤넬은 하이엔드 브랜드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반면, 브랜드 스키아파렐리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가 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극적인 패션쇼라고 하면 주로 알렉산더 맥퀸이나 과거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의 존 갈리아노를 떠올릴 뿐, 그러한 패션쇼를 시작한 엘사 스키아파렐리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후드짚업이나 재킷에 달린 지퍼나 치마바지 등 오히려 우리의 옷장에 있는 옷들에 스키아파렐리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상 속 기성복에도, 럭셔리 브랜드들의 컬렉션에도 큰 영향을 미친 기억되어야 할 디자이너이다. 엘사 스키아파렐리를 소재로 글을 쓰기로 결심하기 전에 겨울 옷을 꺼내다가 지퍼가 달린 플리스 자켓을 보고 문득, 만약 지퍼를 처음 옷에 적용한 것이 엘사 스키아파렐리라는 여성 디자이너가 아니라 남성 디자이너였으면 아마 ‘지퍼의 아버지’와 같은 수식어로 지칭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저명한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패션에 대해 공부할 때 항상 등장하는 디자이너이지만, 그가 현대 패션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에 비해 과소평가 되고 덜 알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만큼은 엘사 스키아파렐리를 기억해주면 하는 바람에 글을 쓰게 되었고 나 역시도 스키아파렐리의 혁신적인 면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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