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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Jan 18. 2021

마녀 키르케

[그루잠04]

최근 매들린 밀러의 소설 키르케를 읽었다. 작가는 사회가 제한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지는 ‘마녀’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었다. 키르케는 오디세이아에서 남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로, 극악무도한 성격의 마녀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후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에게 베푸는 관용이나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후 보여준 너그러운 모습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녀 키르케와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디세이아에는 키르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분명 키르케가 잔혹한 행위를 한 것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소설 키르케에서는 키르케가 마녀가 된 이유를 그의 아버지 헬리오스에게서 찾는다. 또한 아이아이에 섬의 마녀가 된 이후 키르케에게 일어난 일들을 찬찬히 서술하며 그가 자신의 섬을 찾는 이들을 돼지로 만든 이유, 오디세우스의 귀환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한다. 매들린 밀러의 소설 속 키르케는 성정이 극악무도한 마녀가 아니었다. 아이아이에 섬에 찾아온 뱃사람들을 환대해주었다가 겁탈당할 뻔 한 경험 이후 자신의 섬에 접근하는 남성들에게서 똑같은 욕망을 읽어낸 키르케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이들을 돼지로 만든 것이었다.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 시간을 보내며 오랜 시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것 역시 키르케가 오디세우스를 유혹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음에도 키르케에게 반한 오디세우스가 섬에 머무르기를 원한 것이었다. 이러한 부분들은 매들린 밀러가 오디세이아에 나오지 않는 부분들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간 것이기 때문에 실제 호메로스가 그리고자 한 캐릭터와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남성 영웅 오디세우스와 키르케와의 만남을 그의 다양한 경험 중 하나로 취급한다. 또한 강한 힘을 가진 여성 키르케를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르게 하는’ 전형적인 팜므파탈로 그린다. 


소설은 중심인물과 주변 인물이 존재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하나하나 서사를 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여성은 대부분 주변 인물로 그려지며, 근본적으로는 남성 인물에 의해 벌어진 사건 속에서 가해자로 그려진다. 그리스 신화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주신들 중에서도 여성 신은 세상을 구성하는 남성 신들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관장한다는 점에서 그리스 신화의 전반에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오디세이아의 키르케라는 여성 인물 역시 이러한 그리스 신화의 여성 혐오적인 특징이 반영된 인물이다. 


Circe Invidiosa, Circe Offering the Cup to Odysseus / J. W. Waterhouse


위의 두 도판은 그리스 신화 속 여성 인물 묘사로 저명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묘사한 키르케의 모습이다. <Circe Invidiosa>는 키르케의 연인이었던 인간 글라우코스를 신으로 만들어 준 후 그가  키르케를 배신하고 스킬라라는 님프를 사랑하자 질투심을 느껴 스킬라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키르케는 어떤 신도 할 수 없었던,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물약을 만들어낸 바가 있다. 스킬라에게 복수하는 이 장면에서도 같은 물약을 사용하는 것인데, 강력한 마녀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그저 복수심에 눈이 먼 관능적이고 파괴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주제 자체가 사랑하는 이의 연인에 대한 복수라는 점에서 주인공이 영웅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주인공의 강력함보다는 질투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하는 이를 빼앗겨 질투심을 느끼는 남성 인물이 이와 같이 관능적인 모습으로만 표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연인을 빼앗겨 소소하게는 연인을 뺏어간 이를 죽이거나 거창하게는 전쟁을 일으키는 남성의 모습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도상이 대부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의 발단은 사랑이고, 우리의 머리 속에 남은 영웅은 남성 뿐임을 떠올려 본다면 납득이 갈 것이다. 물론 그리스 신화는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Circe Offering the Cup to Odysseus>는 키르케가 스킬라를 괴물로 만든 죄로 아이아이에 해에 감금되어  자신을 찾아오는 남성들에게 돼지로 변하는 물약이 담긴 포도주를 권하던 중, 오디세우스가 섬에 발을 들이고, 그에게 포도주를 권하는 장면이다. 역시나 키르케는 나체가 훤히 비치고 엉덩이와 가슴이 노출된 옷을 입은  남성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키르케가 든 마법 지팡이와 주위에 이미 돼지로 변한 후 죽어있는 남성의 모습 등은 키르케를 강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남성보다 강력한 존재를 그리면서 남성들의 판타지를 더하는 방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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