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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Jan 17. 2021

몰두하기-‘네오탁구’ : 통의동 보안여관

[A모 11]

 

“탁구부에는 오타쿠가 많다. 그래서 다른 부 녀석들에게 무시당한다...”

“탁구는 망상 좋아하는 오타쿠에게 어울리는 스포츠야.”

-<네오탁구> 책자 속 일본 트위터 번역글 중.


Neo-탁구. 전시의 제목에서 느껴지듯, 다섯 작가는 ‘새로운’ 탁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드로잉과 오브제, 선언문, 만화와 영상을 통해 다채롭게 표현된 네오-탁구는 진지하지만, 무언가 서툴다. 그래서 우습다. 작품에 녹아든 진지함이 관객에게 우습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러한 진지한 태도에 어울리지 않는 서투름 때문일 수도(이홍민, 전회강의 마찰, 2020, 단채널 영상, 13:26/최재훈, 탁구를 찾아서, 2020, risoprinted on paper book, 165x210mm), ‘탁구’의 룰에서 벗어난 모양의 것들을 탁구라 칭하는 데에서 오는 괴리(김용관, 핑크퐁 시리즈, 2020, 고밀도 MDF에 수성페인트) 때문일 수도 있다. 전시를 소개하는 포맷 역시 진지함을 잃지 않는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흑백 종이 만화가 가이드하는 전시의  서사는 B급 영웅 서사와 유사하면서도 현실에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탁구가 세계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얼토당토 않은듯 보여 웃기지만, 섬세하게 그려낸 인물과 배경의 작화는 꽤나 멋지다. 여러 작업과 만화가 자아내고 있는 ‘우스운 진지함’은  빼곡한 줄글에 정립된 이론인 <우주탁구선언문>을 보는 순간 경이로운 지경에 다다른다. 아주 이상하고 별 것 아닌 것들이 모여 하나의 정리된 체제를 갖추는 이 모습은 사실, 아주 낯선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홍민, 전회강의 마찰, 2020, 단채널 영상, 13:26
김용관, 핑크퐁 시리즈, 2020, 고밀도 MDF에 수성페인트

수많은 -ism으로 장식된 19~20세기 현대 미술사에서는 neo-, nuvo-, post- 류의 접두사가 많이 등장한다. 이 접두사들은 공통적으로 새로운, 한계를 극복한 이라는 의미를 가져서, 네오-탁구라 함은 기존 탁구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탁구를 의미한다. 이 새로운 탁구가 무엇이며 왜 이것이 필요한 지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론서<우주탁구선언문>이 될 테다. 별 것 없어 보이는 이 메커니즘은 기존 미술사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앙드레 브루통이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한 후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이와 연관된 작품 활동을 펼쳤던 것이나, <다다 선언>과 함께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다다이즘의 활동을 생각한다면 이 ‘네오탁구’의 <우주탁구선언문>과 영상, 조형물이 마냥 장난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시를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우리가 우러러보며 ‘대가’로 배우는 모든 작가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수많은 -ism의 시작이 어쩌면 아주 우습고 ‘오타쿠스러운’ 무엇이었을 수 있겠다, 한 것. 그리고 그러한 시선 속에서 사라진 수많은 ‘덜 오타쿠스러웠기에 역사에 남지 못 한’ 작가들이 있었겠다, 하는 것. 둘째는 전혀 새로운 주제로 미술사의 권위를 의심하게 만드는 작가들의 참신한 시도에 대한 감탄이 들었다. 권위를 가진 의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의문을 풀어내며 유머를 섞기란 더욱 어렵다. 가벼워 보이는 주제에 숨은 의미를 곁들일 때 전시 전체의 무게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전시의 팸플릿을 두, 세 번씩 돌아보게 하는 힘은 이 유머와 반전에 기인한다. 나 역시, 여러모로 아주 똑똑하고 재밌는 전시에 푹 빠져 팸플릿을 소중히 챙겨 왔다.


아쉽게도 작년 말에 이미 끝난 전시이지만,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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