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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Apr 13. 2021

우리의 공간

그루잠[08]

어제 저녁에 스터디 카페에 가는 길이었다. 골목 지하에 있는 도우미가 있다고 쓰인 노래방에서 한 나이 든 남성이 바지 지퍼를 올리면서 길가로 걸어 나왔다. 순간 불쾌감을 느끼면서 왠지 모를 오싹함이 느껴져 얼른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대로변으로 나갔다. 최근 뉴스를 보면 여성을 향한 범죄가 모든 곳에서 일어난다. 길에서, 카페에서, 심지어는 여성의 공간이라고 생각한 여자 화장실에서 그리고 집에서도. 

<이불-시작> 전시회, 시립미술관

저번주에 팡당이들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불-시작>전시를 관람하러 갔다. 미술관 입구와 전시실 초입에 설치 작품들이 있고 커다란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그 공간은 검은색 타일과 벽에 스크린 여러 개를 복도식 공간의 양 옆에 설치하고 공간의 가운데에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앉아 영상을 보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영상에만 집중했는데, 옆에 있던 한 남성 관람객이 보인 후로 전시실 안의 다른 관람객들을 살피게 되었다. 그 남성 관람객은 한 여성과 같이 왔음에도 그다지 편해 보이지 않았고,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여성 전용 공간이 아닌 공간이 여성들로 채워지고 그 속에서 남성이압도되는 경험이 새로웠다. 물론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전시에 남성 관람객들이 오지 않는 것은 이들이 원래 미술관을 잘 찾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제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다는 적나라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남성이 거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누드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불합리를 비판하는 이불 작가의 퍼포먼스들이 의도가 왜곡되어 단순히 성적인 누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여성 관람객들이 그 속에서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고자 자유롭게 영상에 집중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Niki de Saint Phalle <Hon>, 1966

<이불-시작> 전시의 이 공간 속에서 니키 드 생 팔의 <혼(Hon)>이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혼>은 거대한 설치미술 작품이자 관객 참여형 작품이다. 그가 앞서 여러차례 보여준 나나의 모습을 한 거대한 누워있는 여성 형상의 구조물은 그 속으로 관람객들을 불러들인다. 그 입구는 질이다. 그 속에는 니키 드 생 팔의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가슴 부분에 우유를 먹을 수 있는 바가 있어 수유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관람객들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작품은 기존의 남성을 관람객으로 상정하고 작품을 제작하던 남성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여성의 신체를 정복하는 대상이 아닌 여성 스스로가 신체를 열어 인류를 포용하는 어머니의 신체로 체험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배울 때 한 남성이 혼자 작품의 입구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진을 보았는데, 내가 이불 작가의 전시에서 본 남성 관람객의 모습에서 그 사진 속 남성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성적 대상이 아닌 여성의 신체 그 자체를 대한 당혹스러움과 여성의 질을 통해그 신체 속으로 혼자 들어가야 하는 남성 관람객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이 전시 공간이 나에게는 이화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화에서는 모든 일이 여성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며 여성의 주체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 이러한 일들에 남성의 개입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선은 고려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화에서 배운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4년 이상을 생활하다 보면, 이것이 나의 태도가 된다. 그래서 나는 일상 속에서 여성들이 자유롭게 주도권을 갖는 공간을 제공하는 <이불-시작>과 같은 프로그램이 여성이 그러한 태도를 자신의 태도로 자연스레 체화할 수 있을 때까지 더 많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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