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07]
인류세라는 단어는 매우 직관적이다. 이는 인간의 활동이 지질에 수없이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시대, 즉 인류가 지배하는 지질 시대를 뜻한다. 인류세 개념은 2000년 대기 과학자인 크뤼천과 생태학자 스토머가 처음 거론한 개념이다.* 긍정적인 차원에서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지구가 신생대 4기 홀로세 기간 지속돼 온 안정된 상태를 벗어나고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현재를 인류에 의한 위기 상황으로 새롭게 규정할 필요성에서 인류세 개념을 제안했다.** 인류세를 어느 시점부터 책정할 것이냐는 논의가 계속되었는데, 현재로서는 1950년대 초반으로 정리되는 추세라고 한다. 인류의 사회 경제적 활동의 급증으로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 해양 산성화, 오존층 파괴 등 지구 시스템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지질학적 시대 중 그 어떤 시기도 살아있는 생물에 의해 위기를 맞은 적은 없었다. 그냥 단순히 지구 주기에 순환점이 찾아온 것뿐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다.
인간이 인류세를 맞이하게 된 주요 원인은 '몸'의 정의가 인간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바다의 위기에 관련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를 본 적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하여 해양 동물들의 개체수가 급감하고 있는 현실, ‘시장성’ 있는 개체를 잡기 위해 이것에 방해되는 해양 동물을 죽이는 사례들, 인간이 양산한 쓰레기로 인해 해양 생태계가 마비되고 있는 사실 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인간에게 이득이 되지 않거나 ‘거슬리는’ 동물은 죽이고, 필요한 동물은 비인간적으로 개체수를 늘리는 행위는 지구의 균형을 무너지게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런 균형의 붕괴는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사전을 보면, 몸의 정의는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이루는 전체. 또는 그것의 활동 기능 혹은 상태’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이 지니는 '3차원적 덩어리'는 모두 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체의 정의에 있다. 신체의 정의는 ‘사람의 몸’이다. 머릿속으로 이 두 개념을 두고, 커다란 다이어그램을 그려보면, 몸은 신체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쩐지 '몸은 곧 신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정의적으로 보자면 사실 몸이 곧 '신체'라고만 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인류세의 '몸'은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 의미가 '신체'화되어 가고 있다. 즉 몸의 정의에서 자꾸만 다른 존재들은 배제되고, 인간의 신체만이 그것을 독점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지구의 균형은 결국, 지구를 밟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몸의 주체가 될 때, 그리고 그 몸들이 살아나갈 공간에 대해 함께 고민하게 될 때, 비로소 회복될 것이다.
무니페리 작가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지 말아 주소서>는 17분 31초짜리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이다. 한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김혜순 시인의 '돼지라서 괜찮아'의 전체와 해설을 기반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돼지에 대한 단편적인 장면의 집대성으로 이루어진 영상이며 돼지의 존재론적인 의미에 대해 묻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작가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작품 설명을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작가는 내가 아닌 '너의 상태‘인 타자성이 아닌,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타자, 그리하여 너도 나도 아닌 것의 상태인 타자성을 김혜순 시인의 ’ 피어라 돼지‘안에서 찾아보려 한다. (중략) 이 이름이 없는 것들, 번호도 매길 수 없이 덩어리로만 존재하는, 표정으로만 남은 것들의 존재, 어떠한 의미도 남지 않은 쓰레기 상태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동영상은 시작된다. (중략) 비거니즘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페미니즘과의 연대를 말하는 학계의 논문들, 렉처 시리즈들, 국제 컨퍼런스 등등이 있는데 작가는 비거니즘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에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의문을 품는 태도로 작업한다. 흔히 그것이 '동물권'이라는 커다란 이름으로 종속되어 버리기 때문인데, 이내 작가는 죽이기의 바깥은 없다는 생각에 동조하게 되었고 비거니즘 안에서의 틈을 사유하게 되었다.’ [출처 : mooniperry.com]
영상 중에는 격자무늬의 레이어로 덮여 있어 투명성과 '공'의 공간이 된 돼지들이 인간을 통과하여 거의 하나의 존재로 서게 된다.(인간화되었다기보다는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해져 타자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적절할 듯싶다.) 영원히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 타자적 존재가 나와 결합된 순간은 곧 우리가 서로의 '존재함'에 빚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영상의 마지막은 나바호족에 관한 이야기로 꾸려진다. 작가는 나바호 네이션을 순회하며 디네족이 양을 도축하면서 그 영혼의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담았다.***** 죽이기의 바깥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가 추구하는 '비거니즘'은 바로 그들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자'라는 지점을 사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가의 작품을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생각해본 작가의 타자성 개념은 인류세 시대 몸의 확장을 논하기에 적절하게 느껴진다. 나의 존재에 수없이 얽혀있고, 녹아있을 다른 이들의 존재는 너무도 쉽게 ‘식량’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종속되거나, '유용'성으로 그들의 가치를 판단받는다. 이 지구 상에서 사라져도 큰 무리 없는 존재처럼 타자화되고, 집단으로 불리며 해당 개체가 가진 ‘몸’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렇게 이들은 몸에 속하지 못하고 물질화된다. 지금 인류는 그들의 존재가 '몸'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혹은 알지만 이에 무뎌진 것은 아닌지를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에 직면했다.
인류세의 핵심에는 존재들의 연결성을 직시하는 것에 있다. 그것이 인간의 몸이던, 동물의 몸이던, 자연이던 서로에게 빚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그걸 '절실히' 인정하게 된다면 인간은 인류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 최명애, 박범순 「인류세 연구와 한국 환경 사회학 : 새로운 질문들」 p.11.
** 위의 논문, p.12.
*** 위의 논문, p.12.
****이아현 <무니페리 [관계의 바깥에서 의심하기]>
*****조현아 <'의미로 봉합되지 않는' 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