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앙데팡당X아트렉처/수풀]
고아인 여성이 여러 시련을 딛고 유서 깊은 집안의 남성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언뜻 보면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이 줄거리는 영국 작가 샬롯 브론테가 쓴『제인 에어』의 내용이다. 비록 그 플롯은 연애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음에도『제인 에어』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여성 성장 소설이다. 작가인 샬롯 브론테가 소설 속에서 강조하고자 한 지점이 제인 에어가 결국 사랑을 이루었다는 점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그가 주목한 부분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남성 중심적 영국 사회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그 안에서 여성으로서 자아의식을 유지한 채 살아남고자 하는 제인 에어의 투쟁에 있다. 따라서 그가 소설의 끝에서 이뤄낸 사랑조차도 그가 남성 중심적 영국 사회에서 싸워 버텨온 결과로 얻어낸 성장의 훈장이다.
그러나 200년 전에 발행됐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여성 성장 소설인 『제인 에어』에서 조차도 가려진 여성이 있다. 바로 제인 에어의 남편인 로체스터의 숨겨진 부인, 버사 메이슨이다. 버사 메이슨은 로체스터의 전 부인이며, 집 안 대대로 유전된 광증에 사로잡힌 여성이다. 이 자메이카 출신의 여성은 결국 소설이 끝날 때까지 “미친” 여자로서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사라진다. 따라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여성이 남성 중심적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소설 속에서 조차도 그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여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훌륭한 예술 작품 속에서도 어떠한 한계를 발견한다. 아마 남성 중심 사회의 예술 속에는 여성이라는 성에 대한 차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또 다른 층위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에서 이러한 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 바로 인상주의의 선구자인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이다.
마네는 작품의 제목인 “올랭피아”를 당시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창부의 이름에서 따왔다. 따라서 올랭피아 역시 고아인 제인 에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가장 아래 계층의 위치한 여성이다. 그러나 작품 속 올랭피아는 자신의 계층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듯이 당당히 정면의 관객을 바라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턱시도와 양복을 챙겨 입고, 점잔 빼듯이 왕립 아카데미의 살롱전을 구경 온 신사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의 누드를 감상하러 온 그들의 모순을 고발하듯이. 그러니 이 파리의 창부 올랭피아는 제인 에어와 마찬가지로 가장 낮은 계층에 있는 여성들을 그 당시 남성 주의 사회의 모순을 사회의 통해 고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올랭피아> 속 "버사 메이슨"은 누구인가? 아마 작품의 어두운 배경 속 가려진 흑인 하인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창부인 올랭피아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올랭피아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일 것이라는 점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어두운 배경 속 흑인 하인은 하얀 옷을 입고 올랭피아를 위한 꽃을 받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림 속에서 배경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마네의 그림 속에서 한 인간이 아니라, 꽃을 받치는 받침대 정도의 역할로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이 그 자체로 자아를 가진다기 보단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에 위기감을 부여하는 장치로써 기능하였다면, <올랭피아> 속 하녀 또한 비슷하게 그림에서 사물화 된 존재로서 나타난다.
『제인 에어』와 <올랭피아>. 이 선구적인 두 작품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사회의 밑바닥 중 밑바닥, 말하자면 그림자와 같은 여성들이 존재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 여인들은 새롭게 조명된다. 앞서 언급한 버사 메이슨은 『제인 에어』의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는『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Wide Sargasso Sea)』라는 제목의 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작가 진 리스(Jean Rhys)는 버사 메이슨에게 앙투와넷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함으로써 그가 응당 가졌어야 할 자아를 부여한다. 앙투와넷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그 자신을 둘러싼 가부장적인 사회의 압력과 자메이카 여성으로서 영국 사회에서 느끼는 문화적 불안정성을 그려낸다. 따라서 비록 고아 여성일지언정 찬란한 문화를 표방하는 대영제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제인 에어가 미처 보지 못한 사회의 일면을 파악해 그 모순을 고발한다. 마치 제인 에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올랭피아> 가려졌던 하인도 21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다. 미국의 팝 아티스트 래리 리버스(Larry Rivers)의 <나는 검은 얼굴의 올랭피아를 좋아한다 (I like Olympia in Blackface)>라는 작품에서 흑인 여성은 당당히 주변부가 아닌 중심인물로 표현된다. 흑인을 모델로 한 올랭피아가 기존의 올랭피아보다 앞선 위치에 배치되는 것 또한 흥미롭지만, 주목해봐야 할 것은 흑인 하인이 묘사되는 방식이다. 일정한 두께가 있는 재료를 채색한 후 여러 겹 겹쳐 입체감을 돋보이게 한 릴리프 페인팅(relief painting)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 속에서, 흑인 하녀는 더 이상 배경에 잠식되지 않는다. 마네가 그린 기존의 올랭피아에서 흑인 하녀를 둘러싼 비가시성은 리버스의 작품에서 희석되는 것이다. 또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흑인 하녀의 옷차림이다.
마네의 올랭피아 속 하녀가 입은 옷은 들고 있는 꽃다발의 포장지와의 경계가 애매할 정도로 옅은 연분홍색이다. 그의 옷차림이 자신이 받히고 있는 꽃다발과 거의 구별이 안 간다는 점에서 <올랭피아> 속 하녀는 사물과 인간 그 사이의 애매한 경계에 위치해있다. 반면 리버스의 작품 속 하녀는 진한 분홍색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들고 있는 하얀 꽃다발과 명확히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사물화 된 존재, 즉 꽃다발의 받침대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꽃다발을 들고 있는 한 인물로서 작품 속에 등장한다. 물화에서 탈출한 그는 비록 작품 내에서 그 신분은 여전히 올랭피아보다 낮을지언정, 자아와 존재감을 확실히 가진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습득한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앙투와넷 이야기와 <올랭피아>의 하녀는 기존 서양 문화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 이외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작품들이 지적해 낸 것 이외의 사회적 모순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앙투와넷의 이야기는 기존의 『제인 에어』에서 느끼지 못했던 문화적 불평등과 균열을 지적하고, 리버스의 <올랭피아>는 미술 속에서 재현되는 유색인종의 비가시성에 대해 고찰해보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앞선 작품들을 통해 기존의 서양 문명과 백인에 의해 다루어졌던 예술 작품들을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논제들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아시아라는 비주류의 문화 아래 황인종이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 점점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 지구에서 비주류인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받을 때마다 어떤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검은 머리카락 아래, 색깔이 입혀진 피부를 뒤집어쓴 우리가 어떻게 그려지고 또 어떻게 가려지는가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