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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ost it

[Asger Jorn 展] 2부: 대안적 언어

[1호][모그 05]

by E 앙데팡당

대안적 언어: 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19.4.12 - 9.8



1부에서는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틀에서 아스거 욘을 개괄적으로 조명해보았다. 2부에서는 작품을 통해 아스거 욘을 면밀히 읽어보려고 한다.



1. 틀깨기: 왜 틀을 깨려고 했는가?


욘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배경은 한정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마 당시 세계 정세 속에서 욘이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점이다. 뚜렷한 정치적 성향 아래서 거대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수많은 환상과 규율들에 도전하려고 했다. 욘은 예술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사회주의 단체들안에서 대중의통념과 사회적 구조에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을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욘은 작품의 구성 방식에서 '파괴'가 아니라 '전환'을 시도하였다.


<무제: 미완의 형태 파괴> 1959, 캔버스에 유채 (기존 작품에 수정, 이중 액자)

욘은 기존에 있는 그림에 수정을 가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곤 했다. 평면의 그림이지만 그림 안에 행위와 사고의 진행이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행위로서의 미술’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연재한 글, ‘[키스해링展]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에서 행위가 지워지고 이미지만 남은 채로 소비되는 것에 의문을 던진 적이 있다.) ‘수정’이라는 작업을 통해 욘이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꽤 명확하고 철학적이며 시대에 대한 통찰이 드러난다.


기억은 간직하되 시대에 맞도록 전환하라. 몇 번의 붓질로 현대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어찌 옛 것을 버리겠는가? 이것은 낡은 문화에 동시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전환하라. 회화여, 영원하여라.


욘은 회화의 원본성과 고정성에 대한 통념을 부수고, 역동성을 부여하며 과거와 현대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낡은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동시대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세속의 마리아> 1960, 캔버스에 유채(기존 작품에 수정, 이중 액자)

먼저, 욘이 이 그림을 통해 깨려고 했던 틀은 무엇일지 가볍게 생각해보자.


<세속의 마리아>는 유럽 문화를 지배하는 기독교 문화에 대한 전환이자, 서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한 어떤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기독교 미술에서 예수보다 더 많이 그려지는 도상이다. ‘성녀’ 패러다임의 필두에 서 있는 마리아 도상 위에 강한 색채로 거칠게 덧칠을 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이 그림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다양할 수 있다. 기독교 전통, 유럽의 규율, 예술은 창작자가 작품의 시작과 끝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미술에 대한 통념, 또는 ‘성녀’이기를 강요했던 여성에 대한 전통적 시각 등, 보는 이가 어떤 틀을 깨고자 하는지에 따라서 이 그림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예술 작품의 가치는 보는 이에 달려있다.
작품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힘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스거 욘, <침묵의 신화>에서


2. 대안적 언어


아스거 욘 전시관에 들어서기 전에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바로 이 <삼면 축구>이다. 전시관에 들어서기 전에는 이 구조물이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지만, 전시를 다 본 이후에는 이 축구장에 앉아서 아스거 욘의 생각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삼면축구, 아스거 욘이 1960년대에 고안한 축구 게임. 단, 경기의 규칙을 세 팀의 선수들끼리 합의를 해야 한다.



아스거 욘 제작, 제라르 프란체스키, 울리크 로스 사진/ '스칸디나비아 비교 반달리즘 연구소의 <북유럽 미술 속 1만년> 책 제작 프로젝트' 1964

당시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 구도 속에서 아스거욘은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이 어떤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믿음 아래 북유럽 문화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기록, 분석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미국·서유럽 진영과 러시아·동유럽 사이에 위치하는 지리·문화적 배경을 가진 덴마크였기에 더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욘은 삼면축구를 통해 제3의 요인이 이분화된 구조에서 생기는 부정적인 공격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현했다.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 세상에 살고 있다. 스포츠를 보아도 두개로 나누어진 게임 구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세 팀이서 경기를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달리기처럼 여러명중에서 누가 가장 빨리 앞서 나가는 지 가름하는 '기록경쟁'이거나, 양 편으로 갈라서 수비와 공격을 하며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다. 물론 스포츠 자체가 구체적이고 정교한 규칙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재미가 있다. 개인의 감동을 보여주기도, 팀워크의 감동을 보여주기도, 경쟁 상대였던 양 팀의 화합과 화해라는 규칙을 뛰어넘는 감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이런 스토리는 이분화된 구조를 가진 게임을 통해서 파생된 수 많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두 팀으로 갈라진 구조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두 팀에서 세 팀으로만 늘어도 우리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우선, 그럼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거지? 규칙을 어떻게 만들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 팀이 경기를 하는 축구장 안에서는 또 다른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이 있다. 두팀으로 나누어진 경기장 안에서 지금껏 많은 이야기가 생성되었듯이 말이다.



미술은 문화이고 언어이다. 미술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생각을 읽고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욘이야말로 미술의 이러한 힘을 잘 알고 미술을 통해 역사를 만들고 해석하고 화해하려고 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스거 욘의 전시 서문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주요 서술 역사 속 가려진 조각들을 발굴, 조명하여 개인의 기록으로 이루어진 역사 읽기의 대안적 시각을 제안하고자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취이와 아스거 욘이라는 인물이 평행선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모그 05, 201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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