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서양 미술사에 등장하는 화가가 조선의 화가보다 친숙하다. 올해 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전시로서 <근대서화전>을 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화가이자 일제강점기 때 재야에서 다방면에서 미술활동을 펼친 심전 안중식 서거 100주년을 기리는 전시였다. 올해 유독 역사를 기억하는 기획 전시가 많이 열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올해는 심전 안중식이 서거한 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심전 안중식이라는 이름으로 올해 우리가 회고할 수 있는 역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본 전시는 우리로 하여 한반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전시였고, 조선 화가의 이름을 알아가는 데에 유의미한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려진 역사를 드러내는 일에서 여성의 이름을 드러내는 데에는 인색하다.
우선,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라는 이름으로 열린 본 전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국내 서화가들의 작품 활동 및 사회 운동의 흐름을 시기별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 1902년 고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하며 마지막 궁중 화원을 이끌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을 주축으로 조선의 아카데미 미술의 계를 이어가고자 했던 남성 문인 서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음은 근대 서화가이자 미술계의 계승과 사회 참여를 주도했던 심전 안중식의 작품이다. 경복궁과 백악산, 그리고 해태상을 정면에 배치하여 나라가 건재했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일제에 의해 박람회장으로 격의가 훼손된 경복궁의 기개를 되살리고자 '백악춘효'라는 이름으로 백악의 봄을 다시금 깨우고 싶은 의지를 담아내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본 전시의 대표작품이자 전시의 주제를 아우르는, '봄 새벽을 깨우다'의 주인공이다.
1. 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
조선의 궁중 화원으로부터 명맥이 이어지는 조선의 아카데미계는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라는 피해자의 역사 안에서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이 아니라 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적이고 사회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카데미 미술이라고 했을 때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해야 할 것 같지만, 고종의 어진을 그린 사람으로서 눈 앞에서 국가의 몰락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들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나 붓으로 글과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회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부조리를 목격하면서 표현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잡지와 신문을 창간하고 만평을 삽입한다든지, 신문에 소설을 발행한다든지, 소설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든지 이런 사소하지만 대중적인 힘이 있는 활동에서부터, 국내 서화가들의 양성과 참여를 독려하는 교육활동 및 전시회, 공모전 개최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조선 미술계의 활동이 확장되면서 현실적으로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수요가 높아졌다. 공모전을 통해 서화가로 등단할 수 있는 길도 있었으며, 출신과 계급을 막론하고 서화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졌다. 그러나, 나라는 잃었다는 대의명분을 지닌 그들은 남성이었기에 그들이 독자적으로 미술 활동을 펼쳐 나가는 데에 또 다른 구분선을 만들게 된다.
여성의 이름은 세계 각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어느 역사에서든 배제되어왔다. 조선 남성 서화가의 이름도 낯선 우리에게 조선 여성 서화가라는 존재 자체도 낯설 것이다. 조선에서 서화를 그린 여성들의 이름은 동시대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당시에 조선 사회에서도, 그리고 현대사회에서도 과거에 그림을 그리는 여성을 ‘서화가’로서 인정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그들의 족적을 찾아 살피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서화를 그렸던 기생 출신의 여성들이 있다. 여성들이 아무리 서화에 능해도 '기생화가'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수 없었고, 신문에 잠깐 대서특빌 되었다가 사라지거나, 공모전에 입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1). 당시에도 현재에도, 서화를 그린 기생 출신 여성들은 서화가로서가 아닌 ‘서화를 그리는 기생’으로 명명될 뿐이다. 기생의 이름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남성들에게나 의미가 있었지, 기생의 이름을 유의미한 역사로서 기록해온 경우는 없다. 따라서, 서화를 그린 기생 출신 여성들은 서화가로서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한 시대와 한 지역에서 유명세를 탔던 기생으로만 머물러 있다.
당시 '난초를 그리는 기생'이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다고 한다(근대서화전 전시 설명) 즉, 당시 남성 사회에서 여성이 서화를 그린다는 것에 어떠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다. 남성의 영역에 여성이 들어오는 것, 똑똑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배타적이면서 호기심 또는 의구심 가득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더군나 남성 사회에서 성적 대상화 그 자체이면서 유흥의 영역에 있는 여성(기생)이 남성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매력이었을 것이다. 마치 논개의 문인적 역량을 지금까지도 과거 여성의 특별한 재주로 평가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조선 후기에 '신여성을 첩으로 둔 남성'들이 많았다는 점, 또한 기득권 남성들이 선망했던 '똑똑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어떤 여성에 흥미를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 안에서 자신을 보조하고 자신의 즐거움에 기여해야 하는 위치 안에서만 여성의 똑똑함을 허용했던 오만하고 이중적인 태도는 시대를 막론하고 맥락에 맞게 변용되어 나타난다. 허난설헌, 신사임당, 나혜석, 그리고 여전히 결혼과 출산 등의 압박으로 작가활동에 제약을 받는 수많은 현대 한국의 여성 작가들 및 여성들이 모두 그 예이다.
본 전시에서는 함인서와 김능해, 두 명의 평양 출신 여성 서화가의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을 크게 확대하여 삽입해 놓았다.
그러나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도 있다. 다음은 <매일신보> 1922.5.24 에 실린 [조선미전6: 김능해의 국란] 기사의 일부로, 여성 서화가인 김능해를 소개하는 글이다.
"사군자와 송학, 노안 등을 잘 그리며, 그 밖에 글씨가 유명하여 이전 조선공진회와 기타 각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으며 또 가무의 능란함은 물론이고 거문고와 양금에 선수임으로 월전에 특별히 선택되어 평화박람회에 출연하였던 일도 있더라."
과거 역사 기록의 한 부분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관점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시에 여성이 서화의 영역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이 처음이라고 해도, 여전히 현대에도 기생이 서화를 그리는 것이 하나의 오락거리이자 대중들의 호기심 정도로만 비치는 것이다. 현대에도 문화 산업에서 여성은 아이돌 산업과 같이 오락 부분에 치중되어있고, 비교적 진중하다고 여겨지는 영화산업에서는 서사부터 배우들, 제작자들 모두 남성이 중심이 되어 엄청난 성차별을 반영하고 있다. 즉, 여성의 행위는 대의명분의 일이 아닌 작은 일, 부분적인 일, 오락거리 정도의 것으로 축소시키는 시각이 본 전시를 통해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또다시 볼 수 있다. 필자가 갑자기 확장된 논의를 전개하는 것 같지만, 아래 보이는 그림을 통해 더 생각해보자. 다음은 남성 서화가들의 그림 안에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2. 최우석, <승려복을 입은 여인>, 1920년대
위 그림은 분명 승려복이라는 특징을 통해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승려복을 입은 여성이라는 점은 이 대상이 비구니이거나 여성 동자승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면 중앙에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모습은 종교적인 숭고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뒤에 배경에 있는 무녀들은 불교가 아닌 무속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승려복을 입은 여인과 두 무녀를 한 화폭에 배치하면서 종교적인 엄숙함이나 어떠한 도덕성 또는 정신적 가치를 담아내려고 하지 않고,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로 인물을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승려복을 입었다는 것으로 이 화폭에 여성 종교인의 모습을 담았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대상화된 여성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담고 있다. 승려복을 입은 여성을 통해 어떠한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것일까.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출품된 공모작이며, 작가인 최우석은 여러 차례 입상한 역사 인물 화가였다. 본 전시에서는 이 그림에 대해, '불교를 통해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신화적인 요소를 통해 신비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본 미술에서 유행하였던 것'으로, 일본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거 최우석이 이 그림을 공모할 때 사용한 언어 그대로, 비판적 해석을 배제한 채 옮겨놓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래 그림은 서양 미술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역사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그림들이다. 왼쪽의 그림은 '비너스'라는 말로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누드 여성에게 현실의 여성이 아닌 신화 속 여성이라고 명명하면서 현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반면 오른쪽의 그림은 동일한 여성 누드 그림이나, 마네는 '올랭피아'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 유명한 성노동자의 이름을 그림 속 여성에게 붙여주었다. 이는 너무 외설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아카데미에서 탈락시켰으나, 결국 성매매를 했던 남성들의 죄책감과 위선적 면모를 폭로했다는 스스로의 죄책감으로인해 현실 여성의 이름을 가진 누드화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두 그림을 통해 (물론 이를 보여주는 그림은 끝없이 찾을 수 있다) 신화 속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그림들의 전통 안에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하는 위선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미술의 국제적인 영향 안에서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여성을 표현한 그림이라는 해석을 우리의 눈으로 어떻게 심화시키고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역사를 회고하고 무언가를 기억하는 작업은 언제나 중요하다. 또한 그동안 기억되지 못했던 역사를 발굴하고 기억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잘못 기억되었던 역사,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던 역사 등 과거의 부족함을 현재의 눈으로 다시금 재해석하고 그 부족함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는 태도까지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역사적 태도이다. 기념비적 역사를 기리는 것, 아픈 역사를 추모하는 것 외에도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과제는 무한하다. 그 안에 미술사는 미술을 통해, 시각적 표현을 통해 역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이러한 단서를 찾기 위해 때때로 시선을 날카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 기생이 아닌 여성으로서, 그리고 그 여성의 이름을 복권하는 것, 그리고 시각적으로 그려진 여성의 이미지를 해체하는 것은 미술사에 반영된 수많은 성차를 극복하고, 나아가 앞으로의 역사 인식에 타당한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최열 (2013), 「망각 속의 여성 : 1910년대 기생출신 여성화가」,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호, pp69-96.
<참고문헌>
최열 (2013), 「망각 속의 여성 : 1910년대 기생출신 여성화가」, 『한국근현대미술사학』,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