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02]
『아인슈타인. 피카소』
천부적 재능과 더불어 수련에 가까운 기술 연마, 도전, 연구가 월등해야 한다는 것은 천재의 필요조건이다. 천재가 되기 위한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에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전세계적인 천재이다. 필자도 그들이 천재임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천재의 개념 이후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의든 타의든 천재의 이미지 생산에 일조하지 않았나라는 의견을 제시해 본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천재’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1. (서구 백인 비장애인) 남성이다.
2. 조력자 역할을 하는 헌신적인 애인/배우자가 있었다. 그러나 천재는 자신이 착수한 일에 정신이 몰두하느라 애인/배우자, 가족들,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다.
3. 고독을 거부하지 않는다.
4.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며, 자존심이 강하다.
5. 바닥을 치는 시기가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비단 필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재에 대한 단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상들은 천재를 규정하는 프레임이 되어 천재와 천재가 아닌 사람을 규정한다. 필자는 이 기준에 의해 천재가 되지 못한 천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천재가 아닌 자가 천재가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뿐만 아니라 천재로 인정받기까지 그가 빛이 나도록 도와준, 그러나 정작 자신은 빛을 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문항 2에 주목해보자.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폴리스테크닉 연구소에서 만난 밀레바와 교제했다. 아인슈타인보다 네 살 연상인 밀레바는 매우 의욕이 강한 여자로, 거의 전적으로 남성뿐인 전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어보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연애편지를 자주 나누었는데, 이 편지를 통해 아인슈타인이 상대적 운동과 에테르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에 발표한 상대성 논문의 제목인 “움직이는 물체들의 전기역학”이라는 표현이 1899년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에도 적혀 있다. 편지로 말미암아 보았을 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는 데 밀레바가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양가의 반대와 아인슈타인의 취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밀레바는 임신을 했고, 또한 1901년 폴리테크닉 졸업 시험에서 낙제하여 졸업을 할 수 없었다.
1903년 결혼 이후 밀레바는 경제적, 감정적으로 그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명성,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살아가는 방식을 질투했다. 아인슈타인은 밀레바를 갑갑하게 여겼다. 그러던 중 아인슈타인은 1909년 안나 슈미트라는 여성과 바람이 나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밀레바는 안나가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 답장을 가로채 대신 답장을 했다.** 이는 아인슈타인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1913년부터는 엘자 뢰벤탈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1919년 밀레바와 이혼, 엘자를 새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엘자의 두 딸 중 한 명인 일제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고, 엘자는 아인슈타인의 행복을 위해 아인슈타인을 일제에 양보한다.*** 그러나 일제는 아인슈타인과의 관계에 의문을 가졌다. 1920년대의 아인슈타인은 엘자와 결혼했을 당시 이미 업적을 인정받고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는 1924년경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젊은 비서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엘자와 그녀의 딸들은 크게 낙담했지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연구생활에 큰 활력이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의 시대에 전형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다음의 내용이 적힌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존재한다; “창조적인 여자는 극히 드물지요. 나 같으면 딸에게 물리학 공부는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집사람이 과학을 전혀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첫 번째 아내는 과학을 알았지요.” “퀴리 부인은 절대 새의 노래를 듣지 못합니다.”*****
한편 피카소는 십대 때부터 사창가를 드나들고, 창녀들과 어울렸다. 여자들을 비교하는 것은 이후로도 그에게 섹스에서 가장 매력적인 면이 되었으며, 정절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피카소의 화풍이 그의 애인이 바뀜에 따른 결과라고 분석한다. 피카소에게 영향을 준 여인들은 페르낭드 올리비에, 에바 구엘, 올가 코클로바(첫 부인), 마리 테레즈 발터, 도라 마르, 프랑스와즈 질로, 자클린 로크(두 번째 부인)가 있다. 큐비즘을 발명하기 시작할 때 즈음 피카소의 연인은 페르낭드였다. 페르낭드는 부모가 원치 않아 고아로 자랐고, 그녀의 고모는 페르낭드가 십대일 때 그녀를 강간한 폴 페르세롱과 강제로 결혼시킨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한 페르낭드는 1900년 파리로 도망쳤고, 무수한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모델이 되어 생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동거를 했다. 피카소와 사랑을 한 후에도 그녀는 외부에서 모델 노릇을 하며 피카소와 동거하지 않고 일년 이상 많은 다른 남자들을 사귀었다.#***
어쨌든, 피카소는 페르낭드와의 만남으로 청색시기의 고독, 불안감, 초조함에서 벗어나 보다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1906년 이후 페르낭드는 피카소가 자신에게 소홀해지는 것을 느끼고 바람을 피웠고, 피카소의 아이를 유산하여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레몽드라는 이름의 아이를 입양했는데 피카소가 그 어린 소녀에게 로리즘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들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또한 평소 자신의 외출을 금지하고 작업에만 몰두하는 피카소와의 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페르낭드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이를 안 페르낭드의 친구 에바가 틈을 타 피카소의 새 애인이 된다.
페르낭드를 비롯, 피카소의 연인 대다수(제 발로 피카소를 떠난 프랑수와즈는 제외)는 피카소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페르낭드는 친구인 에바에게 피카소를 빼앗기고, 에바는 폐병으로 일찍 죽었으며, 올가의 결혼 생활은 피카소의 다른 여자와의 정사와 작품에만 몰두하는 모습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 도라 마르 또한 피카소의 정리되지 않은 정사에 히스테리를 겪어야 했다.#***** 피카소는 1973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마리 테레즈, 피카소의 자녀들인 클로드, 팔로마, 마야 등은 그러나 자클린의 제지로 묘지에 들어가지 못했다. 피카소와 올가의 아들 파울로와 손자인 파블리토도 장례식에 참석하기를 원했지만 자클린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했다. 파울로는 피카소의 장례식 날 독약을 마셨고 3개월 후에 사망했다. 파블리토 또한 알콜과 약물 때문에 간 질환으로 1975년 사망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를 만난 지 50년 되는 날 차고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자클린은 권총을 쏴 자살했다.##*
현재까지 아인슈타인의, 그리고 피카소의 연인들은 뮤즈 그 이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그들이 한 개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조명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게다가 그들은 천재의 그늘 아래 희생되어야 했다. 전세계적으로 천재로 추앙받는 그들이지만 과연 최측근이었던 애인도 그들을 진정 사랑할 수 있었을까?
보배, 20190407
*아서 I. 밀러(2002), 『아인슈타인. 피카소』, 정영목, 작가정신, 107쪽.
**위의 책, 395쪽.
***위의 책, 401쪽.
****위의 책, 450쪽.
*****위의 책, 450-451쪽.
#*위의 책, 35쪽.
#**최승규(2004), 『피카소의 연인들』, 한명, 31쪽.
#***위의 책, 32쪽.
#****아서 I. 밀러, 앞의 책, 180쪽.
#*****최승규, 앞의 책, 161쪽.
##*위의 책, 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