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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대문 Jan 26. 2023

17. 무던하게 나이를 먹었습니다.

세금이 터지는 12월 31일이 지나갔다.

요란스럽게 폭죽이나 펑펑 터뜨려대는 독일의 연말이 지나면 화약냄새가 자욱하게 깔린 1월1일이 밝아온다.


우리는 자고로 1일에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마음을 다잡고는 하는데, 해가 떠오를 때 창문이라도 열라치면 알싸한 화약냄새가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신선한 공기, 새해의 기운 뭐 그런거 없다.

간밤에 펑펑 터지느라 본인의 할 일을 다한 화약 껍질들이 자욱하게 깔려있는 새해의 정기란. 으음- 올해도 아주 전두엽을 강타하는군.


잔뜩 널부러진 폭죽의 잔해들.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하다. 브런치애 사진이 필요할 지 모르고 안찍어둔 사람..

      

평소에는 나름대로 신사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사는지, 이들의 마음속에도 얼만큼의 흥이 내재되어 있는지. 31일이 되면 이성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쏟아진 쌀알처럼 많다.

그래서 밤늦게 폭죽 터지는 것을 구경하러 가려면 왠만한 결심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만, 그 인고의 시간과 정신나간 폭죽 속에서 조금만 버틴다면 00시가 되는 순간 ‘해피뉴이어’하고 온 지구인이 다정한 한 인류가 되는 것을 경험 할 수 있다.


코로나가 밀려오기 전, 찡긋 웃으며 건네던 새해 복.

      

때는 바야흐로 두툼하게 껴입은 옷과 귀옆에서 펑펑 터지는 폭죽에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시에서 터뜨리는 폭죽을 보러갔던 시절이었다.


00시가 되기 전부터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사람들이 화약에 –못해도 반 달 치 월급을 쏟아붓는 것을 보며 왜 이 구두쇠들이 연말이 되면 지갑을 활짝 열게 디는 것일까 같은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늘을 향해서 폭죽을 쏘아대는 것을 구경하며, 오 저건 한 10유로 짜리, 오 저건 한 50유로 정도 되겠다 하며, 하늘에서 터지는 남의 돈을 즐겁게 감상했다. 사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런 자잘한 폭죽들 보다 00시가 되어 화려한 폭죽이 터질 것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 많은 인파의 머리통들 한참 위에서 터질게 분명한 불꽃이라서 딱히 명당이랄 것도 없지만 왜 인지 자리싸움이 치열했다. 앞뒤 옆, 밀고들어오는 인파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어느정도 자리가 잡히고 나면 은근히 주변인들과 눈인사, 혹은 말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내가 너 옆자리야-같은, 세계 공통의 물밑 약속인 것이다.


그날도 역시, 그 약속은 유효했다. 나름 명당을 차지한 나의 일행들 옆에는 독일인이 아닌 것이 분명한 노부부와 몸만큼 커다란 배낭을 매고있던 배낭여행객들 몇 명, 그리고 독일인으로 보이는 몇 명의 일행들 등등이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말문을 텄는데, 다들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매번 돌아오는 이 날을 흥분으로 물들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기분이 제일 크게 작용하는 것일 터였다.      


그때 까맣게 몰려있던 사람들 머리 위로 누군가 50분이다!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따라붙는 환호와 박수.

그렇게 다같이 기대감과 흥분에 젖어 빛 하나 없는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내 옆에 자리하던 배낭객이 그제서야 주섬주섬 땅을 향해 배낭을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이도 '아, 지금이야?'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역시나 자신의 배낭을 내려놓고 함께 뒤지기 사작했다. 아니 지금까지 뭘하다가 이제 다 같이 하늘을 보는 찰나에 땅을 바라보다니? 그렇게 서너명이 갑자기 이삭 줍는 여인들처럼 가방을 뒤져대기 시작했다. 괜히 이들이 첫 불꽃을 놓칠까봐 걱정이 되어 흘끔흘끔 그 모양새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부터 ’와아아-‘하는 함성이 떠밀려들었다.


10초 남았다!

하는 흥분에 찬 음성이 넘어온 것이다.


그러자 파도타기 하는 것 처럼 다시 저쪽에서! 10초! 또 이쪽에서 10초 남았어! 하는 소리가 와르륵 퍼졌다.

참, 이런 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어디서 다들 그런 박자감을 배우는건지. 합창하는 어린애들 마냥 다같이 10-9-8 하며 초를 세기 시작했다. 독일어를 배운 이래 제일 행복한 순간은 이렇게 군중속의 일반이 되어 독일어로 쩌렁하게 숫자를 외칠 때다. 나도 할줄 안다 독일어-! 같은 느낌이랄까.

      

여전히 옆에 있는 이들은 지구를 담은 듯한 커다란 가방속에서 이삭을 찾는 중이었고, 나도 이제 그들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하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숫자는 계속 이어져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3초였다.

’3-

2-

1-“

땡!


사실 불꽃이 터지는 순간에는 와아-와아 하느라 시진을 찍을 정신이 없다. 겨우 하나 건져올린 사진.- 폭죽이 보이는 것 보다 더 큽니다 :)

      

하늘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폭죽을 시작으로 자잘한 폭죽들이 땅에서부터 쏘아 올려졌다.


‘해피 뉴이어-’ 하는 인사가 바람처럼 전해지고, 이삭을 줍던 청년들이 드디어 허릴 펴더니 눈을 찡긋하며 찰랑거리는 샴페인을 건넸다.

한명은 가방에 플라스틱 샴페인잔을, 하나는 샴페인을, 또 다른 사람은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줄 종이컵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들은 첫 불꽃은 안중에도 없는 듯, 샴페인을 따라서 우리일행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번쩍번쩍 터지는 불꽃아래 찰랑이는 샴페인, 플라스틱 컵끼리 부딧히는 소리와 종이컵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알코올의 향. 수없이 쏘아올려지던 자잘한 불꽃들과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폭죽소리, 그리고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웃음소리.     


샴페인을 받아들은 노부부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오우-오우. 하더니 갑자기 부부 둘이서 진한 키스를 나눴다. 그러고는 영어로 ‘다들 여길봐봐, 우리에게 마침 치즈가 있지’하고는 주섬주섬 품에서 치즈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독일 청년들 몇은 우리는 과일이 있어- 하면서 잘 익은 블루베리를 꺼내들고.

아니 왜 주머니에서 그런것들이 나오는거에요. 그렇게 얼떨결에 나눔받은 것들이 양 손에 가득해졌다.

 

가진게 없던 우리 무리들은 이놈 저놈의 주머니를 뒤져서 마침 사 놓고 먹지 않았던 초콜렛을 발견하며 조각내어 나눔을 시작했다. 그러자 또 다른 쪽에 있던 다른 이가 ‘해피뉴이어’ 하며 종이컵에 맥주를 건네고.      


주섬주섬 먹을 것들을 나눠가며 웃어가며 모든 파란눈과 검은 눈, 그리고 회색 눈을 한 세계의 다람쥐들이 그렇게 웃었었다.     


그렇게 넘겨받은 새해 복을 우물거리고 홀짝이며 다시 바라본 불꽃도 기대 이상으로 번쩍여댔다.


독일인의 세금과 외노자의 세금이 어우려서 하늘을 수놓는 장관이었다. 저 폭죽의 끝자락즈음엔 나의 작은 세금도 함께 터지고 있으리라 생각되어 아련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세금이라도 화려하게 터져서 다행이다. 뭐 그런 생각도 따라붙고.     




이런 순간의 조각들이 올해도 역시나였다.


다만 좀더 어른스러워진 나이의 나는, 근 2년만에 재개된 폭죽의 한 가운데에 서 있을 열정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단단하게 뿌리박은 나무처럼 자리를 지키는 일도, 머리위에서 펑펑 터지는 세금을 보는 일도 조금쯤 시들해졌달까.      


세상에 신기하고 재밌는 것이 없어지면 그게 나이가 먹어가는 증거라던데, 나에게는 오히려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성장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보지 않아도,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을 해낼 수 있었고, 고요하게 보낸 연말은 나에게 색다른 안정감을 주었다.


잠 못드는 이들의 머릿 속에서 울타리를 건너 뛰는 양떼 마냥 이리 저리 발길질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더라. 잘 익은 떡을 공수해와서 숭덩숭덩 잘라넣은 떡국을 먹지 않아도 새해는 밝아오고.


이제는 생일을 밝히는 케이크가 없어도, 화려하게 종알거리는 생일 축하 노래가 없어도 충분하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가 이유없아 온전히 충만해지는 중이다. 그 충만함으로 가득채운 하루가 무던히도 지나가는 것을 종종 뒤돌아본다.      


오히려 내려놓으니 채워진다.

기대하지도 않던 샴페인처럼, 나눠받은 치즈와 블루베리의 조각들처럼. 그렇게 일상의 충만한 조각들이 전해져온다.


두 손 가득 선물을 받아들고선 헤헤 웃던 그날의 작은 다람쥐는 이제 일상의 조각들이 비로소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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