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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통 속에서도, 나는 고마운 사람이고 싶었다

중년의 고통과 후회,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계절이 바뀌고 있다.
창밖의 나뭇잎이 붉고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어느새 나보다 훌쩍 커 있고, 나는 문득 거울 속에서 세월을 실감한다.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젊은 아빠인데, 현실 속의 나는 점점 늙어가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강원도 홍천.
반려견 초코까지 포함해 5인 가족,
가을바람과 함께 찾아온 짧은 여정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도 길고도 깊은 시간이었다.

출발 하루 전, 예상치 못한 치통이 찾아왔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고, 욱신거리는 통증에 얼굴을 감싸 안은 채 새벽을 맞았다.
이대로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아내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오래 함께했다.
그리고 그날 아침, 그녀는 묵묵히 시동을 걸었다.


“아빠, 진통제라도 드세요.”

얼굴에 핫팩을 대고 찜질을 하던 나에게 딸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 말 한마디에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늘 애기처럼 바라보던 딸에게서 염려의 말을 듣고 나니,
이번 여행이 ‘가족을 위한 시간’이라기보다
어쩌면 ‘내가 가족과 함께 있고 싶었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했던 시간들, 미뤄뒀던 약속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우리는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호텔, 소노펫에 머물렀다.
‘애견호텔계의 신라호텔’이라는 소문답게,
실내는 반려견을 위한 배려로 가득했다.
미끄럼 방지 바닥, 조도 조절, 낮은 가구 배치, 온돌형 침대…
온전히 초코를 위한 공간 같았다.

하지만, 그 배려는 어찌 보면 반려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존재로서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 공간에 앉아 글을 쓰려니, 너무 낮은 테이블과 소파 때문에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낮은 거실 테이블 위에 캐리어를 올려 놓고
그 위에 노트북을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안했다.
불편함 속에서 다시 가족과 함께 있는 순간을 곱씹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바베큐를 했다.
숯불을 대여하는 공간에서
집에서 미리 준비해간 소고기와 삼겹살을 꺼냈다.
나는 치통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이며
가족과의 저녁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싶었다.

첫째 아들은 개모차에 초코를 태워 끌어다 주었고,
둘째 딸은 조용히 식탁을 차리고 음식들을 세팅했다.
모든 접시와 반찬을 정리하고 세심하게 챙겼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는 따뜻한 한 마디.

“엄마,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너무 좋다.”

그 말에 아내는 웃었고, 나도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웃고, 이야기하고, 한 끼를 나누는 것이
참 기적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후회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동안 나는 무슨 명분으로 이토록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살았던가?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지 못한 시간들,
아내가 홀로 감당했던 무게들,
초코가 노견이 되어가는 동안 함께해주지 못한 나날들.
그 모든 것의 부재는 나의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정당화되어 있었다.

치통은 그저 통증이 아니었다.
삶이 나에게 보낸 경고장이었다.

나는 최근 헬스를 시작했다.
근육을 키우겠다는 의지와 함께
몸을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의식중에 이빨을 꽉 깨물었던 것,
그리고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가
치수염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된다.
몸은, 마음보다 더 정직하다는 것을.


얼마 전, 60대 어르신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그들 중 어떤 분은 마치 40대처럼 정정했고,
어떤 분은 80대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그 표정과 태도는 전혀 달랐다.

그 차이는 결국 ‘자기관리’에서 오는 것이다.
몸을 돌보는 것, 감정을 돌보는 것,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돌보는 것.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노년의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다.


“준비된 시간은 없다.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도,
삶의 쉼표도,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충실하게 살아야 할 시간이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자기 연민과 후회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다시 ‘가족’이라는 단어를 되새기게 되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태도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중심에는
늘 일이 있었다.
성과, 책임, 목표…
그 모든 것을 짊어진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의 삶에, 가족이라는 존재가 더 깊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다 크기 전에,
아내의 청춘이 모두 지나기 전에,
초코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을 고마워하고, 지키고,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 이 아픈 이 하나를 품고서도
나는 여전히 불판 앞에서 고기를 굽고,
아내와 아이들, 초코와 함께 저녁을 나누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웃고 말하고, 라면을 끓이며.

그게 중년의 아버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리는 두 번 살지 않는다. 지금이 전부다.”

– 메릴 스트립


나는 지금, 아프지만 행복하다.
후회하지만 감사하다.
조금 늙었지만, 더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나와 같은 40대 중후반의 당신에게도
그 따뜻한 저녁 식탁 같은 순간이
꼭 찾아오기를 바란다.


2025.10.9.(목)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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