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의 강박, 관계의 짐,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에 대하여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글을 참 잘 써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와 자부심이 밀려왔다.
하지만 곧 나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힘들어하고,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하다.
흐린 날이면 공기부터 다르고,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불안이나 냉소 같은 감정의 잔향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의 파동에 가장 먼저 휩싸이는 사람이다.
마치 감정의 측정기, 온도계, 기압계처럼
누군가의 말 한 마디, 눈빛 하나에
마음의 기후가 급변하는 날이 많다.
우리는 ‘성실함’을 미덕이라 배웠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과잉된 성실’이 도덕적 기준이 되었을 때 발생한다.
성실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사람,
열심히 살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
조금 쉬고 싶다 말하면 무책임한 사람처럼 취급당한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을 자기 인생의 등대로 삼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린다.”
– 한병철, 『투명사회』
우리는 성실하지 않으면 도태될까 봐,
부지런하지 않으면 남에게 미움받을까 봐,
쉼 없이 달린다.
그러나 그 끝에는 늘
지친 나 자신만 남는다.
오늘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무대 위에서 살아간다.
SNS는 일상의 무대이고,
직장은 성과의 경연장이며,
일상조차 타인의 관찰 속에서 연기하는 듯하다.
‘좋은 사람’,
‘열심히 사는 사람’,
‘비교적 성공한 사람’이라는 낙인 혹은 칭찬이
실은 나의 감정을 가장 쉽게 가리는 가면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기준 삼아, 나를 평가하는 방식에 길들여진다.
그 시선이 무서워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건 원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삼키고,
“나는 지금 외롭다”는 감정을 감춘다.
관계는 점점 더 형식적이고, 서로에게 짐이 된다.
관계는 원래 따뜻해야 할 것이었으나,
오늘날 많은 관계는 형식적으로 유지되는 감정의 거래가 되었다.
“친구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부모니까 이해해줘야지.”
“동료끼리 이 정도는 같이 가야지.”
이 모든 말 속엔
묵시적 요구와 정서적 부채가 숨어 있다.
그래서 관계는 점점 피곤해지고,
연락은 의무가 되고,
침묵은 멀어짐이 아니라 비난이 된다.
나는 묻고 싶다.
“서로를 짓누르지 않는 관계는 정말 불가능한가?”
“가벼운 관계는 무책임하다는 오해는, 누가 만든 것일까?”
“사랑과 우정은 짐이 아니라 쉼터여야 한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고등학생 시절,
나는 철학을 꿈꾸던 문학소년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방황했고,
서른 살의 나는 아직도 내 자리를 찾지 못한 직장인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흔이 넘은 나는
가정도 이루고, 사회적 안정도 얻었고,
표면적으로는 제법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내면은 여전히 불안하고, 허전하고, 요동친다.
10대의 갈망, 20대의 혼란, 30대의 불안이
단 한 번도 내게서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멈춰 있는 듯한 이 기이한 시간.”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실은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연기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어디론가 향하고는 있지만,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돛을 세운 채 떠도는 작은 배 같다.
사회가 정해준 이정표,
‘좋은 학교 – 좋은 직장 – 좋은 삶’이라는 공식을 따라
열심히 달려왔지만,
지금에서야 묻는다.
“이 길이 정말 내가 원했던 길이었을까?”
출세, 성공, 인정, 돈…
그토록 목말라 했던 것들이
막상 손에 들어오면
오히려 삶을 더 허전하게 만든다.
“내가 달성한 성과가,
내가 원하던 삶의 증거는 아닐 수 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래서 오늘,
나는 심리적 단절을 선언한다.
더는 타인의 기대에 휘둘리지 않겠다.
더는 성실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다.
더는 관계의 짐을 묵묵히 지지 않겠다.
내 삶의 방향타를
사회가 아닌,
타인이 아닌,
나의 손에 쥐겠다.
단절은 도피가 아니다.
나에게 되돌아오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가볍지만 따뜻한 관계를,
덜 성실하지만 더 솔직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사회는 자율을 말하면서 통제를 강요하고,
관계를 권장하면서 짐을 지운다.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타인의 시선은 나의 삶을 책임지지 않고,
과잉된 책임은 내 감정을 갉아먹을 뿐이다.
진정한 관계는
서로를 가볍게 하고,
서로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만이
개인을 살리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2025. 7. 12.(토)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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