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공감도 효율로 따지는 세상에서, 나를 잃지 않는 연습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사람을 피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피곤해졌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은
묘하게 불편하고 무거워졌다.
처음엔 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 사람이 아니라,
그가 떠올리게 만든 ‘누군가’가 내 안에 있었음을.
나를 무시하던 상사,
나를 배제했던 동료,
말 한 마디로 마음을 짓밟고도 아무렇지 않던 사람들.
지금의 그는 그들이 아닌데도,
어느새 나는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말투, 어떤 눈빛, 어떤 억양은
나도 모르게 감정을 ‘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감정이 망가진 반응이었다.
알레르기처럼,
나의 정서가 과거의 상처에
과민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감정은 본래 유연한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누적되면,
감정은 오히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보다,
미리 차단하고, 미리 단정하고,
미리 피하는 쪽이 정신적으로 더 안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새로운 사람에게 면역 반응을 보인다.
낯선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데 쓰는 에너지가
이젠 너무 버겁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느끼는 ‘인간 알레르기’다.
사람이 두려운 건 아니지만,
사람이 피곤한 건 분명하다.
우리는 감정마저도 선택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슬픔은 업무에 방해가 되고,
기쁨은 조심스럽고,
공감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눈물은 ‘약점’이 되고,
웃음은 ‘전략’이 된다.
어느 순간, 우리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웃고 있어도 진심이 아니고,
‘괜찮다’고 말해도 마음은 무너져 있다.
사회학자 아를리 호크실드(Arlie Hochschild)는
이런 현상을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라 불렀다.
조직이 요구하는 감정을,
직무의 일부처럼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은 능숙해졌지만,
감정을 ‘진짜로 느끼는 능력’은 점점 잃어간다.
이제는 더 이상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기뻐도 너무 티 내면 안 되고,
슬퍼도 업무에 지장이 없어야 하며,
화가 나도 침착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을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수준에서만 허락받고 있다.
문제는 그게 너무 오래되면,
진짜 감정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슬퍼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게 습관이 되고,
분노조차 논리적으로 포장하다 보면,
내 마음은 결국 사라진다.
어느 순간, 나는 진짜 내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낯설어졌다.
친구는 많고, 단톡방도 여러 개고,
카카오톡 연락처에는 수백 명이 있다.
하지만 정작,
진짜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은 없다.
가족이 있고, 동료가 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기보다는
업무 보고나 일상 통보로 하루가 끝난다.
특히 책임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의 자리일수록,
감정보다는 ‘기능’이 우선이다.
지쳤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기대를 거둘까 봐 말하지 못하고,
슬프다고 말하면 약해 보일까 봐 삼켜버리고,
외롭다고 하면 징징댄다는 말이 돌아올까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말하지 않는 법부터 먼저 배운다.
그렇게 관계는 남아있지만,
그 속에 마음은 점점 고립된다.
페르소나(Persona).
심리학자 융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쓰는 ‘가면’을 이렇게 불렀다.
사회적으로 잘 작동하기 위해 우리는
상황에 맞는 얼굴을 골라 쓴다.
문제는 이 가면이 너무 익숙해지면
가면이 ‘나’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항상 웃는 얼굴,
언제나 침착한 말투,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나.
하지만 그건 진짜 내가 아니다.
나는 원래 그렇게 항상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다.
기분이 가라앉는 날도 있고,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밤도 있다.
진짜 나의 감정을 돌아보지 않으면,
언젠가 관계 속에서도 나를 잃는다.
감정을 회복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천천히, 내 마음에 묻는 것이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감정을 참았는가?”
“나는 지금, 진짜 괜찮은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실은 나, 조금 외로웠어.”
“요즘 좀 힘들었어.”
이런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꾸진 않겠지만,
나를 다시 나답게 살아가게 할 수는 있다.
사람은 피곤하다.
말이 상처가 되기도 하고,
침묵이 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또 사람을 원한다.
진심 어린 눈빛,
따뜻한 말 한마디,
그 한 사람의 존재가
지친 하루를 견디게 해주기도 하니까.
“상처는,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었다는 증거다.”
나는 다시 사람에게 기대고 싶다.
다시 감정을 나누고 싶다.
그렇게 나를 회복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사람에게 지쳤다.
말은 아끼게 되고, 표정은 점점 굳는다.
감정이 닳고 있다는 느낌,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이 마음을
그저 견디는 데 하루를 다 써버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나, 정말 잘 살아낸 거다.
감정을 눌러가며,
억지로 웃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무너지지 않으려 꽤 오래 버텼다.
그게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이제는 나 자신이 알아줘야 한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내 감정에 솔직해도 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느려도, 잠시 멈춰도 괜찮다.
이 정도면, 나는 충분히 잘 해왔다.
이 말을 나 스스로에게 건네며
내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답게’ 살아가는 감각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2025. 7. 12.(토)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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