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멈춘 자리에서, 교육의 내일을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글쓰기를 멈춘 상태다. 정확히는,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다. 교감으로 부임한 이후, 물리적 시간은 조금 더 확보되었고, 외부 활동이나 출장도 이전보다 줄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글에 손이 가지 않았다. 행정 업무 속에서 몸은 덜 지쳤는데, 마음은 더 굳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분노와 답답함이 내 글의 연료였다. 교육청에서 장학사로 일하던 시절, 쏟아지는 문서와 끝없는 회의 속에서 나만의 호흡을 찾는 길은 오직 글쓰기뿐이었다. 불합리를 목격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었고, 그것이 글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절박함이 사라졌다. 시스템 안에 들어온 나는, 어느새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내 안의 글쓰기를 지탱하던 것이 간절함이었다면, 지금은 그 간절함이 나를 떠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교사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교사였고, 앞으로도 교사일 것이다. 교사가 된다는 것은 단지 교실에 있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설계한 구조 속에서 나 자신을 계속해서 갱신하고, 의심하고, 재해석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그 요구를 무시한다. 교사로서의 자각은 가르침의 현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낯설게 보는 순간에 온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어도 괜찮은가? 내가 지키는 교육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멈추는 순간, 교사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다. 그는 기능적 노동자, 시스템의 톱니바퀴일 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공교육을 옹호해왔다. 공교육이야말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후의 안전망이며, 모두에게 열린 배움의 기회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신념이 내 교육 행정, 콘텐츠 제작, 유튜브 활동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공교육 전도사’라는 안전한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공교육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판도 차단해버리는,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그동안 내가 써온 글과 말들이 일정한 알고리즘에 갇혀 자기복제되고 있었고, 그것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학교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대부분 산업사회적 요구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정해진 시간표, 교과서, 일제고사, 그리고 평균이라는 이름의 위계질서. 이 구조는 20세기에 만들어진 효율성 중심의 교육 모델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작동 ‘하고’ 있다기보다는 작동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시스템이 진화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도 진화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 시스템에 편승한 채, 진화의 시계를 멈춰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에는 ‘해체주의’가 있다. 기존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여는 사유 방식이다. 나는 교육도 해체주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무조건적인 파괴가 아니라, 낡은 껍데기를 벗기고 본질을 다시 조명하는 일이다.
공교육도 마찬가지다. 그 본질은 ‘모든 아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건 그 본질이 아니라 껍데기다. 형식이다. 교장, 교감, 교사, 학생이라는 위계와 규칙, ‘정답’이 있는 시험과 평가 기준, 이 모든 것이 본질을 가리고 있다. 해체 없이 재구성은 불가능하다.
AI는 스스로 학습하고 예측한다. 세상의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업로드되고 있으며, 아이들은 유튜브와 틱톡, 인스타그램으로 세상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교과서 한 권을 1년 동안 공부하라고 한다. 시간표에 따라 종이 울리고, 교사는 교탁에 서고, 아이들은 교과서의 순서대로 문제를 푼다.
이 구조에서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을까?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기를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공장식 교육’을 하고 있다. 분업화된 지식과 기능만을 주입하고, 창의와 통찰, 협업과 메타인지, 리더십은 수업 외 영역에 맡긴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밖에서 아이들이 진짜 세상을 만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AI가 모든 지식을 제공하는 시대, 교사의 역할은 달라져야 한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탐색하고 연결하고 촉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사는 안내자이며, 동행자이고, 피드백의 거울이다.
학생 역시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니다. 자신의 학습 여정을 설계하고, 실패하고, 도전하며, 다시 설계하는 능동적 존재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AI와 함께 살아갈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이 아니라, ‘답이 없을 때 방향을 설정하는 감각’이다.
우리는 ‘학교가 공장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이미 학교는 오랫동안 공장 같았다. 매뉴얼 중심, 평가 중심, 성과 중심의 교육은 창의성과 모험심을 말살했다. 그러나 이제 학교는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실패를 환영하고, 질문을 격려하며,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할 수 있는 장.
그런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표부터 바꿔야 한다. 개별화된 학습 계획, 학생 주도 프로젝트, 교사 간 협업, 지역사회와의 연계 등은 모두 기존 시스템과 충돌한다.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반드시 시도해야 한다. 무너지지 않으면, 새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육 시스템은 교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끊임없는 행정과 민원, 수업 외 업무로 인해 교사들은 ‘가르치고 싶은 마음’을 잃어간다.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일보다 보고서 작성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교실은 점점 ‘설계된 학습’이 아니라 ‘관리된 공간’이 되어간다.
교사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깨워야 한다.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그에 맞는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교사의 깨어있음이야말로, 교육의 혁신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나는 오늘부터 다시 글을 쓰겠다. 더 이상 공교육의 편에 서는 글만이 아니라, 공교육의 한계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글을 쓰겠다. 나의 글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이 살아 있어야 한다. 나의 생각이 살아 있으려면, 나의 감각이 낯설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학교’라는 건물이 아니라 ‘배움’이라는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교실 밖에서도 가능하고, 교사 없이도 시작되며, 시험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 나는 교사로서, 교감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이 전환의 시대에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지 더 치열하게 고민할 것이다.
생각의 미로에서 길을 잃는 것,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길이 열리는 징후다. 오늘 내가 다시 펜을 든 이유다.
2025. 9. 22.(월)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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