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와 망자의 길
날이 갈수록 호진의 꿈은 더욱 선명해졌다. 매일 밤 김연후의 절박한 눈빛과 비명 소리가 그를 괴롭혔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감각들이 생생히 남아있어, 호진은 점점 현실과 꿈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그날 밤, 호진은 또다시 그 꿈을 꾸었다. 하지만 이번엔 더욱 선명하고 자세했다.
호진은 마치 투명한 유령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늦은 밤, 회사 건물의 야외 계단.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희미한 달빛만이 그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김연후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결의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손에는 서류 뭉치를 꼭 쥐고 있었다.
그때 두 남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연후 씨, 잠깐만요." 한 남자가 말했다.
"비켜주세요. 전 이대로 둘 수 없어요." 연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해봅시다." 다른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더 할 얘기 없어요. 이 비리를 그냥 넘어갈 순 없어요."
연후가 계단을 내려가려 했지만, 두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놓으세요!" 연후가 소리쳤다.
"이봐요, 진정해요." 한 남자가 말했다. "우리도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실랑이가 벌어졌다. 연후는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 했고, 두 남자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호진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뭔가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순간, 연후의 발이 계단 끝에 걸렸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두 남자의 얼굴도 순간 겁에 질렸다.
"안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연후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호진은 그 광경을 보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쿵-
무거운 소리와 함께 연후의 몸이 바닥에 닿았다.
계단 위의 두 남자는 공포에 질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 어떡해..." 한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해." 다른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본 건... 그녀가 스스로 떨어진 거야."
두 남자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호진은 연후의 몸 옆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녀를 통과해 버렸다.
연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도와주세요..." 연후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진실을... 알려주세요..."
호진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연후의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다.
"연후씨..." 호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창밖으로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호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는 알았다. 이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연후씨, 제가... 제가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호진의 눈에 결의가 서렸다. 그는 이제 이 미스터리를 파헤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호진아, 너 요즘 왜 이러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호진은 만두 빚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엄마.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혹시 무슨 고민 있니? 엄마한테 말해봐."
호진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주말이 되자 호진은 인천의 웨딩뷔페로 향했다. 일식 주방에서 바쁘게 일하는 동안만큼은 꿈 생각을 잊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피곤한 모습은 동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호진 씨,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이네요." 주방장 이모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네... 요즘 좀 이상한 꿈을 자주 꿔서요."
"이상한 꿈이라니?" 옆에서 일하던 부장이 관심을 보였다.
호진은 잠시 망설이다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주방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이거 무시하면 안 되겠는데." 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점집에 한번 가보는 게 어때요?"
"맞아요." 주방장 이모가 거들었다. "내가 아는 좋은 점집이 있어요. 한번 가보세요."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거 안 믿어요."
"믿고 안 믿고 가 중요한 게 아니야." 동료 중 한 명이 말했다. "지금 네 상태가 심각해 보여. 한번 가보는 게 어때?"
결국 호진은 동료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주방장 이모가 추천한 점집의 주소를 받아 들었다.
다음 날, 호진은 망설이다 결국 점집을 찾아갔다. 좁은 골목 끝에 자리 잡은 낡은 건물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내가 미쳤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실내는 어둡고 향 냄새가 짙게 풍겼다. 호진의 눈이 어둠에 적응할 무렵, 나이 지긋한 여인이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점쟁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무엇 때문에 오셨나요?"
호진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요즘 이상한 꿈을 자주 꿉니다."
점쟁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떤 꿈인지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호진이 꿈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점쟁이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김연후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났군요."
호진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가 왔었어요. 죽기 얼마 전에..." 점쟁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아이의 운명을 봤을 때, 나는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했죠. 하지만..."
호진은 숨을 죽이고 들었다.
"당신과 연후는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 아이가 당신을 찾은 거예요. 도움이 필요한 거죠."
"하지만 어떻게... 제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죠?"
"그건 당신이 찾아내야 해요. 연후의 영혼이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려는 거예요. 그 메시지를 찾아내고,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호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점집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 김연후의 비극적인 운명과 자신의 삶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녀를 도울 수 있을지 찾아내야 했다.
그날 밤, 호진은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꿈속에서 연후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이번엔 공포에 질린 모습이 아닌 약간의 희망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