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켜낸 것들

소소한 일상을 만나기 위해

by bluepeace

나는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며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눈에 띄는 성취도, 남들이 손뼉 칠 만한 결과도

내 인생의 중심에는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지켜냈다.


누군가는 그것을 버텼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단순한 버팀이 아니라

의식적인 선택이었고,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는 걸.



나는 두 아이를 키웠다.

열심히 키웠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매일을 내어주며 키웠다.


아이들의 하루를 앞세우느라

내 하루는 늘 뒤로 밀렸고,

엄마라는 이름 안에서

나는 자주 사라졌다.


그래도

아이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이들의 성장 곁에서

끝내 자리를 지켰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몸은 한때

나를 배반한 것처럼 느껴졌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다.

회복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몸을 믿지 못하는 시간은

마음까지 무너뜨렸다.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이 세상과의 연결을 놓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살아 있음’이 아니라

‘기억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다행히

기억은 돌아왔다.


그날 이후

나는 안다.

기억을 되찾았다는 건

다시 살아갈 이유를 돌려받았다는 뜻이라는 걸.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이 단어들은

내 삶의 한 시기를

너무 정확하게 설명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지쳐 있었고,

아무도 나를 밀지 않았는데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가끔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숨 쉬는 것조차

노력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죽지 않았다.


이 말을 이렇게 담담하게 쓸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지나왔는지

나는 알고 있다.


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하루를 넘겼고

또 하루를 넘겼다.



무기력은

내 시간을 가장 집요하게 노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들고

모든 선택을 미루게 하고

나 자신을 점점

덜 중요한 존재로 느끼게 했다.


그때마다

나는 크지 않은 것들을 지켜냈다.


하루 한 번의 산책,

겨우 만들어낸 한 끼,

포기하지 않고 앉아 있었던 몇 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 자신에게 준 작은 약속들.


그 사소한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나를 지켜냈다.


지금의 내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면

만날 수 없을 사람이었다.


언젠가

조금 더 숨이 편해진 얼굴로

“그래도 잘 버텼다”라고

말해줄지도 모를 나.


그 사람을

기다리기로 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끝내 놓지 않은 것들이었다.


내 목숨,

아이들과의 시간,

작고 평범한 일상,

무기력 앞에서 도망치지 않은 날들,

그리고

다시 살아갈 나에 대한 희망.


나는 오늘도

여전히 지키는 중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존중받아도 좋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월, 수, 금, 일 연재
이전 24화이기적인 남자의 밤은 지루하다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