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 집안에서 태어난 크리스천의 고백
아무나 신가물이 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은 친절했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위로 같기도 했고, 경고 같기도 했다. 병원에서 듣는 말처럼 담담했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몸이 먼저 반응했다.
우리 집안에는 무당이 둘이나 있었다.
어머니의 친할머니는 유성에서 이름이 제법 알려진 사람이었고, 친고모의 시어머니 또한 굿판을 열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집안 어른들은 늘 그 이야기를 하다 말았다. 이야기는 항상 “그런 집안이야”에서 끝났고, 마지막엔 꼭 이런 말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끊었지.”
끊었다는 말은 이상했다.
칼로 자른 것도 아닌데, 실처럼 이어진 무엇이 정말로 끊길 수 있을까. 어릴 땐 그 말이 그냥 어른들의 자기 위안처럼 들렸다. 설명하기 어려운 걸 설명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말. 더 묻지 않기 위한 말.
나는 그런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먼저 겪은 사람이었다. 성령 체험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고, 그 이후로 나는 믿음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이미 선택된 상태로 살아왔다.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다.
갑작스럽게 울음이 쏟아졌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느꼈다. 살아 있다는 감각, 붙들리고 있다는 확신. 그 경험 이후로 나에게 하나님은 개념이 아니었다. 의심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래서 점집에 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난생처음이었다.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마음이 너무 복잡했고, 결심이라고 하기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쩌면 그날 나는 답을 찾으러 간 게 아니라, 확인받으러 간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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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집 문을 열었을 때, 특별한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향 냄새도, 음산한 기운도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일상적이라서 당황스러웠다. 무당은 나를 오래 보지 않았다. 유난히 들여다보지도, 의미심장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대신 내 손을 보더니 방울을 하나 건넸다.
방울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금속의 온기가 아니라, 온도가 없다는 느낌. 손바닥에 올려놓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긴장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각성에 가까웠다.
“느껴지는 거 다 말해봐요.”
그 말은 질문 같지 않았다.
명령도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허락처럼 들렸다. 말해도 된다는 허락,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방울을 흔들자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내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만든 소리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던 소리에 내가 잠시 관여한 느낌. 오래된 물건을 만졌을 때 손보다 기억이 먼저 반응하는 것처럼.
나는 말하기 시작했다.
무당 손안에 있는 것, 내 등 뒤에 놓인 것. 맞춘다는 감각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내가 알고 있구나.’ 추측하거나 계산한 게 아니라, 말하기 직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기분. 설명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확신.
무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이 길로 가는 건 아니에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근데… 없는 건 아니네.”
그 말은 이상하게 무겁지 않았다.
선언도, 예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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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계속 손을 씻고 싶었다.
더러워서가 아니라, 무언가가 아직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방울의 차가움이 아니라, 그 순간 내가 나 자신을 믿어버린 감각 때문이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고, 삶의 방향이 바뀐 적도 있다. 그런데 동시에 내 몸 어딘가에는 설명되지 않는 통로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신앙과 무속을 같은 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단순한 구분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나에게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감각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선택받은 게 아니라
그저 열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열려 있다는 건, 특별하다는 뜻이 아니라
닫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들어올 수 있고, 지나갈 수 있고, 남을 수도 있다는 뜻. 그리고 그건 축복이 아니라 부담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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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어른들이 말하던 ‘끊었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로 끊긴 걸까. 아니면 더 이상 부르지 않았을 뿐일까. 물이 흐르지 않는 강바닥에도, 비가 오면 흔적이 다시 드러나듯이.
믿음은 언제나 정결해야만 하는 걸까.
신은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그만큼 제한적인 걸까.
그날 밤, 나는 기도를 하면서도 유난히 조용했다. 질문을 쏟아내지 않았다. 대신 오래 가만히 있었다. 아무 응답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버려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에 가까웠다. 판단하지 않고, 멀어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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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시 점집에 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건, 그날 이후 내가 나 자신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믿음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직해졌다. 내가 어떤 감각을 가진 사람인지, 어디까지 열려 있는 사람인지.
어쩌면 신은 내가 이 길로 가기를 원하지 않아서,
대신 알아두기만 하라고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선택하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방울을 쥔 손은 떨렸지만
나는 아직 내 삶의 방향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의 나를 지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