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포가는 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며칠 간의 감포 출장에 앞서, 엄마와 주말 경주-감포 여행에 나섰다.
서울에서 엄마가 타고 오던 기차는 무더위로 일부 구간에서 서행을 했고 예정된 도착시간보다 약 20분 늦게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역에서 엄마를 만나 찾아간 냉면 맛집, '원미면옥'은 이미 주차장이 꽉 찬 상태. 급히 맛집 검색으로 찾은 대전 동구의 '조선오리'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오리 백숙의 맛이 꽤나 만족스러워 여행의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옥천 ic를 통과해 고속도로를 탔다. 추풍령과 김천, 구미, 대구, 경산을 지나 경주로 가는 길, 엄마는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이란 곡을 듣고 싶다고 했고, 우린 같은 곡을 몇 번이나 들었다. 경주로 들어서는 길에선 엄청난 폭우가 순식간에 내렸다가 사라졌다.
그전 잠시 평사휴게소에 들렀을 때, 휴게소에선 청도 곶감을 팔고 있었다. 하나 먹어보니 맛이 좋았다. 엄마의 곶감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바로 구매했다. (이 지역 곶감은 워낙 유명하고 맛이 좋다. 엄마에게 틈틈이 사 보내곤 했었다)
장시간의 운전을 마치고 경주의 한 호텔에 도착하니 다시 하늘이 맑고 푸르다. 오늘 저녁은 엄마가 보고 싶어 했던 동궁과 월지 야경을 본다. 내일은 감포로 넘어가 감포의 바다를,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함께 볼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우리 참 노력 많이 했다, 엄마"
우리의 삶을 여행에 비유하면 어디쯤 왔을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런 이야기를 나는 거의 매년 하는 것 같다. 특히 이번 여행은 10년을 넘게 탄 차를 팔고 얼마 전 새로 산 차를 타고 와서 더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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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문득 그 옛날 그때가 떠올랐다 -십수 년 전 동대문구의 어느 오래된 주택의 낡은 방에서 나는 새벽에 화장실을 가다 꽤나 큰 크기의 바퀴벌레를 밟았다. 내 발바닥에 그대로 느껴지던 그 촉감(또는 질감)을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그것을 밟은 순간엔 잠결에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무엇을 밟았는지 금세 깨달았다. 그것은 몸의 반쪽, 상체만 남은 채 앞다리를 열심히 휘저어가며 어딘가로 기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까, 혐오감보단 이젠 동질감마저 느껴지는 기억이다.
"언제나 학비를 걱정해야 했어요. 전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한때는 정말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고요"
회사에서 만나 꽤 오래 알고 지낸 상대방에게 어쩌다 웃으면서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깜짝 놀라는 모습이 선명하다. '요즘 시대에?'라고 생각할진 모르지만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또 많은 이들이, IMF를 맞은 부모 세대의 자식들 중엔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으리라.
차상위계층 또한 (일부지만) 국가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니, 성적은 언제나 A+를 받기 위해 도서관에 밤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했다(그리고 실제 거의 전 과목을 A 또는 A+를 받았다). 성적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면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아르바이트비는 모두 고스란히 생활비와 빚의 이자를 갚는데 써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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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기차로 가는 여행 프로그램인) '역장투어'만 보내기 좀 그랬는데, 오늘은 우리 함께 '아들투어' 하네"
몇 달 전엔 엄마가 (엄마의 휴가기간을 맞아) 혼자 제주도 알파캠프에 다녀왔다. 그때도 돈만 보내고 함께 가지 못한 게 내심 미안했다.
언제나 <지금> 만큼 소중한 건 없다고, 요즘 나는 생각하며 산다. 한 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만 바라보고 살던 때도 있었지만, 그리고 때로 거기에 매몰되어 있었지만 모두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반대로 미래는 만들어 가는 거라고, 항상 다짐했던 나 이기도 했다.
결국 지금이 곧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더라.
나를 사랑한다면 과거의 내게, 미래의 내게 미안하지 않도록 지금을 부지런히, 알뜰하게, 똑똑하게, 건강하게, 용기 있게, 그리고 나의 사람들을 잘 아끼며 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 나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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