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나를 비추는 거울
"나 너 다신 안 봐"
"그래, 다신 보지 말자"
불혹의 나이를 앞둔 남자 넷이 한밤중 용산역 근처 어느 펍에 모여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이들은 아주 오랜 친구이자 또 오랜만에 모인 터였다(서로 각자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보거나, 축사를 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내일 아내, 아이와 아기상어 공연을 보러 가야 하니 와이프가 조금만 마시라고 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따 지방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또 말이 없고, 누군가는 화가 나 씩씩대며 사온 담배 한 갑, 연초를 주방에서 빌린 가위로 과감히 잘라냈다(그 모습을 본 옆 테이블에서 환호성과 박수를 쳤다).
이들은 해가 지기 전 모여, 그 짧은 몇 시간 동안 이미 술을 꽤나 많이 먹은 후였다.
한 두번의 소동 이후, 떠났다는 그 친구에게 전화했다.
"아 어디야. 가긴 어딜 가. 빨리 와 그냥"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갈려고 했는데, 그럼 나 아이스크림 사갈게"
어느새 테이블은 넷에서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었다가 다시 넷이 된다.
희한하게 이 친구들과 모이면 이런 모습이 반복적으로 연출된다. 친해서일까. 아니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술자리가 끝나고 남은 건 잃어버린 기억과 화기애애해 보이는 여러 사진들, 그리고 서로 왜 싸웠는지 모를 이유와 마지막엔 나 자신에게 느껴지는 위화감이다.
내게 느껴지는 위화감.
그건 내 자신감과 오만의 경계에서 느껴진다. 남들이 내게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말과 행동을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오랜 친구(들)에게 내가 해버렸다면 그건 분명한 오만이다.
주량에 대한 오만함.
아주 오랜 친구라는 데서 나오는 익숙함이 이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만함.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믿어줄 것이라는 오만함.
그런 오만함이 내게서 느껴지다 못해 밖으로 스멀스멀, 아니 뿜뿜 발산되고 있었다.
다음엔 술의 경계선을 잘 지켜야지.
오랜 사이에서 나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더 신경 써야지.
"미안하다", "고맙다"
다음 날, 단톡방에 서로 남기는 그런 말들이 괜히 머쓱해졌다. 그래도 그런 말조차 쑥스럽다고, 친하다고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런 말이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