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제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데미안을 읽으며 유레카를 외치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 구절을 강의실에서 보게 되다니! 데미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2살 초입, 여전히 바람이 매서운 1월 어느 때. 중학교, 고등학교 때 이미 두 차례 읽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데미안을 다시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세 번째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데미안의 메시지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라는 것, 세계는 그렇게 이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나는 20살 때 만나 친하게 지내던 S에게서 답답함과 거부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 검열로 가득한 S와의 대화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둘 밖에 없음에도 실체 없는 제3자가 상처받을까 지나치게 걱정했다. 아니, 눈앞의 상대가 어떤 잣대로 날 평가할지 몰라 온 세상 모든 잣대를 스스로에 들이밀며 미움받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나도 S도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었고, 그렇게 2년이 흐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땐 그 감정을 적확히 알아차리지 못했을뿐더러 원인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냥 때때로 화가 나 욕을 할 때면 S가 “그렇게 나쁜 말 쓰면 안 돼”라고 지적하곤 했는데 그 말이 유독 거슬릴 뿐이었다.
싱클레어가 선악의 이분법이라는 알을 깨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읽으며 나는 일말의 해방감을 느꼈다. ‘S가 내 안의 자연스러운 악을 억압했기 때문에 그토록 답답했던 거였구나!’를 깨달으며 속으로 몇 번이나 유레카를 외쳤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선악이란 단순한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고, 특히 감정의 영역에서 ‘악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자아 찾기’가 시작됐다.
엄마를 부단히 미워하다
현재는 과거의 상흔일 뿐일까? 만약 그렇다면 가장 큰 상흔은 무엇일까? 아마 가족에게서 비롯된 것이겠지. 누군가는 이를 잘 봉합해 흉터로 남아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상처가 곪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자아 찾기’는 내 삶의 가장 큰 상처를 찾아 애도하고 잘 봉합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데미안으로 시작된 자아 찾기가 나름대로 끝나기까지 약 3년이 걸렸다. SNS를 끊고 일기를 쓰고 정신과 의사의 유튜브를 전전하고 상담을 받고 혼자 여행을 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하고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한편, 때로는 여전히 회피하며 괜찮은 척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엄마를 부단히도 미워했다.
엄마는 부정적 감정에 취약했는데 스스로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감정에 휘둘렸고, 스스로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온갖 부정적 감정을 비•반언어적으로 표현했다. 그럴 때면 오빠와 나는 각자의 방에서 겁에 질려 ‘혹시 나 때문인가?’ 의심하며 엄마의 한숨 소리, 예민함이 서려 있는 혼잣말, 서랍을 쾅 닫는 소리 등을 듣고 있었다.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마찬가지로 감정에 취약한 사람이었기에, 엄마가 그럴 때면 어쭙잖은 농담이나 던지며 핵심 감정을 회피하기 바빴다.
덕분에 오빠와 나는 말해주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쉽게 알아채는 재주가 생겼고, 그 재주 덕분에 나는 타인의 반응에 지나치게 예민했으며 쉽게 피로감을 느꼈다. 또한 모든 문제의 원인은 엄마의 횡포 때문이라는 생각에 억울함은 점점 커져갔다. 내가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엄마의 성격이 변할 리는 만무하기에, 엄마는 계속해서 나의 상처를 건드렸고 커갈수록 엄마의 횡포에 대한 나의 역치는 낮아졌다. 나는 엄마의 표정 하나 말씨 하나에 쉽게 화가 났고, 역설적이게도 엄마와 꼭 닮게 화를 표현하고 있었다.
잘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어
가부장적이고 먹고살기 바쁜 부모 밑에서 자라 감정을 대하는 게 서툴었던 나의 부모는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감정적으로 태어난 나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그렇게 나는 정서적 지지가 결여된 회피형 인간으로 자라났다.
정서적 지지의 결여는 자의식 과잉과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발현되었다. 특히 엄마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수용받기보다, “뭘 잘했다고 울어?” “너는 고작 1년 힘들지만 나는 20년간 힘들었어.”라는 식의 부정과 회피로 회답받았던 나는 사랑받기 위해 뭐든 잘해야 했다. 그리고 착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의 공부머리와 아빠의 성실함을 닮아 나는 공부를 잘했고, 눈치도 빠르고 착했기에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미디어가 만든 허상의 ‘완벽함’을 끊임없이 갈망했기에 불안했고 공허했다. 드라마와 SNS가 연출한 찰나의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에 절여져 저 밝고 화려하게 채색된 이미지들만이 삶 혹은 세계라고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이미지와 실제 삶의 간극을 매 순간 느끼며 고통받았다[1]. 같은 학교라도 어느 학부나 어느 학과인지, 같은 회사라도 어느 지점, 어느 부서인지 서열을 매겨놓고 인간의 가치에 값을 매기는, 인생의 모든 요소들에 관해 서열을 부여하고 가장 섬세한 측면에까지 우열을 만드는 대한민국 사회는 나의 불안과 공허를 더욱 심화시켰다.[2]
‘너 정도면 귀엽게 생겼지’라는 말을 듣던 못나지 않은 외모임에도, 꽤 오랜 기간 외모 콤플렉스로 고통받았던 이유는 내 외모가 남들보다 잘나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겪어보는 우울이 찾아온 이유 역시, 고등학교 때 상위권을 섭렵하고 전교 부회장으로 전교생에게 유명했지만 대학 입학 후 다시 평범한 1인이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지금 여기
나는 자아 찾기 과정을 거치며 곪아있던 근원적 결핍을 흉터로 남길 수 있게 됐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나의 밑바닥까지 함께 내려가주셨다. 살면서 처음으로 공감과 연민을 받았고 덕분에 상처받은 어린 나를 위해 심장이 아릴 만큼 울며 슬퍼할 수 있었다. 외롭고 긴 애도의 기간이 끝나자 더 이상 감정을 부정하지 않게 되었고 비로소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과거에 휘둘리지 않았고 마침내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는 엄마를 안아주며 달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엄마를 ‘엄마’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안쓰러워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S와도 자아 찾기 과정에선 잠시 멀어졌지만 우연한 계기로 다시 가까워지게 됐고 나는 지금 S와 함께 온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운이 좋았다. 좋은 상담사 선생님을 만났고 내 찌질한 속내를 듣고 놀라면서도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엄마는 너무 깊지 않은 상처를 냈으며 다정한 아빠의 충분한 사랑과 인내 덕분에 내겐 이미 상처를 회복할 힘이 내재돼 있었다.
그럼에도 인생은 잘 짜인 장난과도 같아서 나는 주기적으로 쪽팔린 일을 만들어내고 자주 그로부터 고통받는다. 그러나 더 이상 쪽팔림을 회피하지 않는다. 더 이상 허상의 완벽한 이미지에 속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볼품없음을 인정하며 삶과 현실이 놓여있는 실제적 맥락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때로는 쌍꺼풀 수술을 하며 사회적 기준에 타협하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에 기깔나는 사진을 업로드해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압박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두려움을 향하여
나는 드라마 PD가 되고 싶다. ‘모호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가장 나답게, 전인적으로 살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감정을 다루되 이를 영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시대 흐름을 읽어 지금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포착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배경, 사건, 캐릭터를 설정해야 한다. 예술적인 동시에 상업적이어야 하며 협업에도 능해야 한다.
드라마로 연출된 영상과 지루한 현실을 비교하며 그 간극에 그리 고통받았음에도 나는 그 길로 걸어가려 한다.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역설 가득한 것 아니겠는가? 현장을 겪다보면 연출된 이미지로부터 더욱 자유로워지지 않을까하는 욕심도 섞여있다.
멋들어지게 포장했지만 막상 드라마 PD가 된다면 고된 업무 환경과 막대한 책임감이 나를 짓누를 것이다. 그에 앞서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드라마 PD가 되는 것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버텨낼 수 있을까? 두렵지만 지레 겁먹고 도망가기보단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겠지! 두려움은 사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의 반증 아닐까? 너무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기보단 눈앞에 당면한 과제를 차근차근 해 나가려 한다.
나는 내 속에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한다. 먼 훗날 불안이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 이 글을 기억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1] 정지우,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2020, 한겨레 출판, p.65
[2] 정지우,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2020, 한겨레 출판, p.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