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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벌새 Dec 10. 2023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생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읽으며

한 시인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타인이 주관적으로 확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다.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라고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사자가 그 말을 할 때에는 설사 신세한탄의 형식을 취한다 해도 그것이 자기 직시의 효과를 발휘해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이 그런 말을, 그것도 그를 그 불행에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의사도 없이 할 때는, 그런 말이야말로 그가 미래의 다른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꺾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견과는 달리 "21세기의 어느 하오"가 왔을 때 시인 최승자는 무덤 속에 있지 않았지만 대신 병원에 있어야만 했다. 진실과 허위를 분별하는 감각이 예민하고 그 둘의 뒤섞임을 못 견디는 이에게는 살아 있음 자체가 항구적인 정신적 투쟁일 것이다. 그 투쟁이 2000년대 초반 이후 그를 정신의 병으로 이끌어갔으리라. 입원 중이었던 2010년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몸무게 34킬로그램의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을 할 때 그는 이번 생의 승자처럼 보였다. 시인의 건강을 빈다. 부디 그의 가까운 곳에, 그를 다정히 안아주는 사람이 많기를.

-인생의 역사, 신형철



신형철 평론가를 알게 되어 얼마나 행운인지! 왜 이제야 알게 된 건지!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오만함을 인지하게 됐다. 덕분에 '오만함에서 탈피하기'라는 나만의 과제가 시작되었다. 평생의 숙제가 될 수도 있겠다. 어제 A와 나눈 대화에서 A가 말했다.  "나는 사람을 잘 분석하고 잘 판단하는 편이야"라고. 솔직히 말해서 그 말이 듣기 불편했다. 예전 같았으면 '오 그렇구나' 내지는 '오 신기하네'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마 그 말이 듣기 불편했던 이유는 A의 말에서 나의 오만을 봤기 때문이겠지.


 얼마 전에 친구들과 자존감과 인격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존감이 높으면 인격이 높을까? 자존감이 낮다고 인격이 낮을까? 뭐 그런 식의 질문에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었달까. <자존감이 낮으면 인격이 절대 높을 수 없다> 파와, <자존감이 높아도 인격이 낮은 사람도 많다>파로 갈려 꽤나 아기자기한 토론을 펼치다 결론은 모르겠다로 끝났다.


 그때 A는 자리에 있던 친구 B에게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네가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했거든?"이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B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내가 화들짝 놀라며 “이런 말 해도 돼?”라고 말하자 대화 주제가 급히 바뀌었다.


 아마 A가 사람을 분석하는 기준에는 ‘자존감'이라는 큰 줄기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자존감 담론에 익숙한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듯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거늘, 문득 자존감 담론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두 가지로 제한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감이 높다와 낮다로. 한 사람의 고유한, 원석 같은 인간성과 아름다움이 이분법으로 나뉜 자존감 담론에 감춰져 빛을 보지 못한다. 너의 고유성, 나의 고유성은 '자존감'이라는 불완전한 추상어에 갇혀버린다.


 모든 해석자는 '더' 좋은 해석이 아니라 '가장' 좋은 해석을 꿈꾼다. 이 꿈에 붙일 수 있는 이름 하나를 장승리의 시 <말> 한 구절에서 얻었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내게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세상의 모든 해석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꿈이란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했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단언을 즐기는 사람들도 당사자의 면전에서는 잘 그러지 못합니다.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없이는 말할 수 없다는 이런 제약이 저는 가끔 축복 같습니다. (...) 저는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섬세해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섬세한 사람이 되어볼 수는 없을까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실험해 보고 싶습니다. 이 말은, 제가 실제로는 섬세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래서 계속 비평을 열심히 쓰겠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이 태어났다.

-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A가 B에게 하려다 마무리 짓지 못한 말은 아마 "나는 네가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인격은 훌륭하다고 생각해왔어" 였겠지. A는 오만하지만 섬세하다. A는 자존감이라는 얇은 막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B의 원석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화들짝 놀라지 않았더라면 A는 B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겠지. 미숙하지만 사랑스러운 너를 거울삼아 폭력적인 단언이라는 오만을 멈추고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섬세한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사람을 과연 정확하게 사랑할 순 없겠지만 너를 단언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구겨버리고 너다움을, 너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 온 마음 다 바치려 한다. 알아주는 사람 없다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 허우적대는 네게 다가가기 위해 헤엄쳐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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