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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벌새 Nov 02. 2024

안녕, 치기 어리고 생기 어리던 나의 날들

20대 초반을 애틋하게 일컫는 말이 있으면 좋겠다. 오늘 나의 20대 초반 생활이 매듭지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름답게. 20대 초반과의 아름다운 이별, 아름다운 마무리. 이 아름다움의 대상을 그저 '20대 초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건 참 애처롭다. 20대 초반과의 이별을 상징하는 사건이 오늘 하루에만 두 번 일어났다. 그중 한 사건은 큰 의미는 없지만 기가 막힌 우연으로 다른 중대한 사건과 같은 날에 일어났기에 나는 나 혼자 제멋대로 오늘을, 아니 어제를, 2024년 11월 1일을 나의 20대 초반 생활이 끝난 날이라고 이름 짓는다.

  오늘 아침은 우체국 택배의 도착 예정 카톡 알림으로 잠에서 깼다. 안 그래도 카페인에 약한데 이틀 연속 커피를 마셨더니 깊게 자지 못했고 이틀 내내 쌓인 피로가 개운하게 풀리지 않아 아주 불쾌한 아침이었다. '택배 올 게 없는데 뭐지?'하고 보니 얼마 전 세미 손절한 친구에게서 온 택배였다. 20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친해진 친구였고 우린 꽤 가까웠지만 나는 최근 그 친구와 세미 손절을 했다. SNS를 통해 편집된 그 친구의 일상을 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겹지인이 많음에도 인스타 차단을 갈겼으니 이건 아무리 살펴봐도 현대판 세미 손절이 맞다. 하여튼 우리의 관계가 세미 손절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는 그 친구와는 여전히 카톡 친구인 까닭인데 최근 나는 뻔뻔하게 그 친구에게 카톡을 했다. 네가 빌려 간 내 책 좀 돌려달라고.

   침대에서 계속 밍기적대고 있다 보니 얼마 안 있어 택배가 도착했다는 카톡이 왔고 왠지 긴장되는 마음이 들었다. 왜 자기를 차단했냐는 증오 편지가 들어있으면 어쩌지? 란 기대 어린 걱정을 했는데 택배 포장 상태를 슥 훑어보니 뜯어보지 않아도 책만 있다는 게 느껴졌다. 왜인지 모르게 실망해서 포장지도 뜯지 않고 신발장 위에 대충 걸쳐두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묘하게 긴장하고 기대한 만큼 나의 에너지는 고갈되어 아주아주 피곤한 아침이자 그냥 아침부터 오늘 하루는 망했다 싶은 그런 하루였다. 그렇게 머리도 안 감고 대충 옷을 입고 졸업 시험을 보러 갔다.

  어머나. 졸업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20살 초반에 좋아해서 고백을 두 번이나 했다가 거절 당한 친구가 앉아있었다. 4년 만이었다.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반갑게 인사했다. 20대 초반의 치기 어린 감정이지 않은가! 인사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하다! 그리고 정말로 반가웠다! 비슷한 타이밍에 졸업 시험을 마무리하면 좋으련만 나는 30분 만에 졸업시험을 마무리했고 그 친구는 한참 문제를 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증말.... 기다려 말어....? 괜히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다시 만지며 시간을 끌다가 우연히 나가다가 마주친 척 연출해 볼까 했다. 하지만 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연출하려면 30분을 화장실에서 있어야 했기에 이 작전은 기각하고, 1층과 4층을 왔다 갔다 거리며, 괜히 먹고 싶지도 않은 새콤달콤을 하나 사서 시간을 끌어보며 한 10분을 이 친구를 기다릴까 말까 고민했던 것 같다. 결론은 인문관 앞 작은 정원에서 간단한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날 때까지 그 친구가 안 나오면 그냥 집으로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아 참! 그 친구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내가 이 친구를 기다리는 이유는 다시 잘해보자는 마음 때문은 절대 아니었으며 그저 반가움 때문이라는 것을 언급해두고 싶다. 물론 단순한 반가움이라고 하기엔 그 반가움 속엔 반가움도, 아련함도, 아쉬움도, 따뜻함도 섞여있는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첫사랑이라고 하기엔 그 친구를 좋아했던 마음에는 애정과 존중이 없었고,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소유하고픈 마음이 없진 않았던 아주 어리고 울퉁불퉁한 마음이었다. 세월이 조금 흘러 그 울퉁불퉁한 마음이 이해되고 치기 어림을 생기 어림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시점에 나의 그 생기 어림을 직관한 사람이, 고통으로써 경험한 사람(그때 그 친구는 나를 두 번이나 거절하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냔 말이다!)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어떻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할 일을 마치고 노트북을 덮으니 정말 소설처럼 그 친구가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가방을 싸곤 그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반가워했고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물어보는 이 순간을 즐거워했다. 나는 전과 달리 서울말이 제법 늘었고, 그 친구는 전과 달리 스몰토크 실력이 늘었다. 동선이 겹쳐 예상보다 더 길게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더 길게 어색해하고, 실 없는 농담을 하고, (전과 달리 편안히) 눈을 맞추며 웃고, 즐거웠다. 나는 그 친구 이름을 부르며 "오늘이 아니면 이제 너랑 이야기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아서"라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친구는 악수를 건네며 "다음에 또 보자"라며 이야기를 마쳤다. 아마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이야기해 준 게 얼마나 고맙던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나온 이후부터 곽진언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를 자주 들으며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곤 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던 것 같다. 물론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겠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그 친구와의 만남을 기분 좋게 떠올리며 이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너무 신났고 즐거웠는데 곡이 끝나갈 때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 친구한테 차였을 때도 나지 않던 눈물이 그렇게 갑자기! 버스에서 내려서도 좀좀따리로 계속 눈물을 흘렸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게 아닐까? 아, 나의 치기 어린 20대 초반은 이제 지나갔음을, 그리고 나의 20대 초반은 나의 울퉁불퉁함을 보았음에도 나를 여전히 웃으면서 바라봐 주고 응원해 주고 있음을.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언젠가 법정 스님이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글을 읽었다. 아름답게 한 번도 마무리한 적 없던 나를 부끄러워하며 조만간 아름다운 마무리를 맺을 수 있길 소망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에서야 인생 처음으로 내 손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맺었다. 늘 모든 걸 다 손에 쥐고 싶어 하다가 추접스러운 마무리를 했었는데 말이야.


  안녕, 치기 어리고 생기 어리던 나의 20대 초반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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