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타자의 시간을 제거한다. 이 시간 정책에게 타자의 시간은 그저 비생산적인 시간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생산 논리를 벗어나는 고양된 시간인 축제의 시간도 제거한다. 축제는 탈생산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p.119)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 자기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소외는 다름 아닌 자기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성과주체가 자신을, 예컨대 자신의 몸을 최적화해야 할 기능적 객체로 지각하는 순간, 이 이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서서히 소외된다. 부정성이 없기 때문에 이 자기소외는 의식되지도 않은 채 진행된다. 자기착취뿐만 아니라 신체도식의 장애로 나타나는 자기소외도 자기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거식증, 폭식증, 대식증 등은 심각해져가는 자기소외의 증상들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몸을 더 이상 감지할 수 없게 된다. (p.63) - <타자의 추방,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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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지수 언니를 만났다. 코딱지 묻히고 다니던 유치원 시절의 내 모습을 아는 사람과 지금까지 만나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그날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취했다. 기분 좋은 취기가 돌자 무뎌져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잠시 기능하는 것을 멈추고 아주 오랜만에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같이 등산을 간 것도 아닌데 언니가 등산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저절로 기분이 좋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느낌. 돌이켜보면 등산 이야기를 하기 전, 언니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순간부터 나는 비슷한 감각을 느꼈던 것 같다. 어쩐지 자연과 교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달까. 아마 사회적 정형성에 깎이기 훨씬 전의 '태초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본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1차에서 기분 좋게 취한 우리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만약 지수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편안함과 쾌척함을 찾아 실내에 앉았을 것이다. 테라스에 앉아 있으니 찐득하지만 서늘한 기미가 있는 바람이 불고 노을이 지고 야경이 보인다. 서촌에는 높은 건물이 없어 야경을 보고 있으면 아늑함도 느껴진다. 나는 언니와 대화하면서 느꼈다. 언니는 지금 내게 타자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나를 권태롭게 하는 동질성의 지옥에서 벗아나게 해준 유의미한 타자임을.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약간의 숙취와 함께 아주 비효율적으로 보내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만남을 떠올리며 <기러기>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 영화를 만들면서 두려움에 잠식되고 온갖 크고 작은 마감일에 스스로를 갈아 넣으며 잊고 있던 감각을 되살려준, 불안감에 휩싸여 자기 착취하는 내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준, 손잡으니깐 쑥스러워하던 cutie (경)상도 girl 지수에게 애정과 감사를 보내며 짧은 글을 마친다 ☆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