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일기]
* 2012년(만 21세)부터 2018년(만 28세)까지 경험했던 맥도날드 아르바이트 일기 시리즈
* 맥도날드 배달 아르바이트 했던 시절의 짧고 작은 에피소드 모음
1. 휴식 전까지 배가 많이 고팠다. 휴식시간에는 내가 싫어하는 여자애랑 같이 있었는데 사담도 그럭저럭 나눴다. 내가 뒤에서 개쌍욕을 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던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이 여자애도 나를 뒤에서 상당히 욕했을 것인데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욕은 하지 않고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는 것이 참 많이 기묘했다.
2. 주문이 굉장히 많이 밀렸는데 매니저가 들어오는 족족 접수하는 거다. (설명: 매니저가 접수하면 그 순간 주방에 주문내역이 떠서 그 주문 건 햄버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앞에 배달나가지 못 한 주문 건이 많이 밀려있다면 접수하지 말고 전화를 걸어 취소시키거나 조금 있다가 접수해야 하는데 매장의 배달완료시간이 매장평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실제 배달이 한 시간 반 뒤거나 어쩌건 그냥 다 접수 넣어버리는 것임) 이건 매니저에게 아무리 소리를 쳐도 참 반영이 안 된다. 나에게 맨 앞의 주문과 저 뒤쪽에 같이 갈 수 있는 것 묶어서 나가라길래 중간 집들도 많이 밀렸으니까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가겠다고 정색을 하고 그냥 한 집만 챙겨서 나와버린다. 정말 빨리 해치우고 싶은 의욕도 사라지고 생산성이 떨어짐... 나는 나중에 더 나이를 먹어 누군가의 상관이 되거나 지시할 일이 생긴다면 직원들의 의견과 입장을 섬세하게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음.
3. 오늘 409번지 빌라 401호에 갔음. 매장에서 15초도 안 걸리는 곳이다. 기분 좋게 나와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누른다. 어떤 아저씨가 같이 탔는데 층수를 안 누르길래 같은 층에 가나 보네 생각한다. 내려서 401호 벨을 바로 누르니 이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고 <거, 거긴 우리 집인데!> 너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임. 나는 이게 왜 그렇게 웃겼는지 웃음을 꾹 참고 <아 그러세요> 한다. 주문한 손님은 바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아저씨가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어주셨다. 그런데 초등학생 아이와 엄마가 세트 단 두 개를 시킨 것 같더라. 계산하고 있는데 아저씨는 계속 <아니, 햄버거를 시켰냐, 나는 몰랐네>, <아니, 우리 집에 시키다니> 혼자 충격받아 중얼거리시고 아이와 엄마는 시큰둥...
4. 나는 배달원이 되기 전부터 몇 개의 꿈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어딘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짜장면 시키신 분!> 하고 소리를 질러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M PC방에서 그 꿈을 이뤘다! 좌석 번호를 안 적은 거야! 나는 PC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햄버거 시키신 분!>하고 큰 소리를 내며 기분이 참 좋았고 내 상태창에 금색 배지 하나 추가된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오늘은 인사를 잘해주셔서(보통은 게임 중이라 눈도 못 마주치는데 오늘 손님은 예능 같은 걸 보고 있었음) 기분이 더 좋았다.
5. E 아파트는 엘리베이터 한 번 타려면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한다. 뻘쭘한 시간을 감내하던 중 인자하게 생긴 어떤 남성분이 내 옆에 선다. 내 배달가방을 보더니 <맥도날드가 이 근처에 있나 봐요?> 말을 걸어온다. 나는 <예, 가깝죠. 오토바이로 3, 4분 걸려요>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외 매장의 위치나 요즈음 맛있는 햄버거 등 몇 마디 더 나누고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간다. 나는 8층이고, 그분은 22층이다. 나는 8층에서 내리며 몸을 15도 정도 굽혀 <안녕히 가세요> 인사한다. 나의 과한 정중함에 남성분은 환하게 웃으며 본인도 몸을 굽힌다. 나는 8층 벨을 누르기 전에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서비스직을 본업으로 삼아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중할 수 있었을까? 내가 논문실적이 의무인 교수가 아닌 그저 석사과정생이라 소논문 쓰는 게 즐거울 터이지. 그래 내가 다양한 분야에 발을 살짝만 담그고 있는 것이 요즈음 행복한 이유 중 하나겠구나 싶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