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꽃을 질투하며 나는 탑을 쌓는다

[생산 중독자의 초상] 작성일: 22/03/29

by 문영

최근 어떤 협의회에서 설문조사 작성하는 게 있어서 성심 성의껏 제출하였더니 오늘 신세계 상품권을 받았다. 나는 이런 자잘한 부수입이 꽤 잦다. 추첨을 통해(내용을 검토해) 기프티콘을 보내드린다는 설문에 응하면 꽤 자주 받게 된다. 적게는 음식점 후기조사 등 2천 원 상당의 편의점 쿠폰에서 크게는 아이디어를 입력해야 하는 설문 등 3, 5만 원 정도의 백화점 상품권까지... 기분이 꽤 좋았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크든 작든 그에 따른 보상이 따를 때 그것이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준다.


나는 <생산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란 인간은 본래 상당히 생산적이고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생산적이고 말고를 떠나서 <생산적 행위> 자체를 깊이 사랑한다. 나는 내 몸을 내가 꾸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심리적으로 상당히 큰 안정과 편안함을 느낀다. 예컨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대학원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도 물론 분명히 큰 의미가 있고, '학문적으로 성장했다'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학벌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통용되는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여 국립대학의 학위를 얻어냈다>를 넘어설 수는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생산성이 그다지 중요한 가치가 아닌 사람들도 많다. 조직에서 본인이 맡은 과업을 잘 해내는 것보다 그저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번 돈을 사랑하는 사람과 기꺼이 함께 쓰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마주하면 솔직히 어렵고 불편하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너를 위해서는 모든 걸 다 줄 수 있어'라는 말이나, '네가 일을 그만두라면 당장 그만둘게'라는 어느 가사 등이 불편하다는 말이다. 눈앞에 보이는 해야 할 일들보다 개인적인 감정과 행복, 너=나=우리, 풍선과 꽃 같은 것들로 기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렵다.


한편, 나는 왜 생산적인 행위들이 좋을까? 유년시절 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거듭 배우며 자랐다. 무엇이든 결정할 때에는 내 판단이 중요했고 어렸던 부모님은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20대 초반, 본가에서 할머니와 죽일 듯이 싸우고 집에서 독립해 떨어져 나오고서부터는, 나는 돌아갈 집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월 23만 원만 내면 잠글 수 있는 작은 방은 언제든 구할 수 있으니 물리적인 집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지치고 힘들 때 기대거나 회귀할 가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래서 아르바이트가 그렇게 좋았다. 몸은 고됐지만 어디에든 소속되어 내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좋았다. 가정에서 내 존재가 충분하게 보듬어지지 못해서 그랬던 것인지, 나는 어디서든 소속된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기능하는 것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 집에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 혹은 책에서 배운 '무조건적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더 쉽게 믿고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공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세우고 함께 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르바이트가 싫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애들은 거리낌 없이 불평하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나는 일하는 장소를 잃는 것이 힘들고 괴로웠다. 그래서 심지어 해물탕집 아르바이트를 4년,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7년을 꼬박 해왔다. 그리고 지금 첫 직장에서 6년을 채워가고 있다. 이곳은 가정에 기댈 수 없었던 나에게는 마치 가정과 같은 소속감을 주는 곳이다. 지금 일을 그만둔다고 하면 나는 아마... 너무나 괴로워질 것이다. 슬퍼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들에게 자격지심도 많이 느끼고 동시에 짜증도 난다. 한 10년 전쯤, 나에게 영어학원비를 대주는 등 경제적으로 조금 도와주려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마 공감 못 할 감정이겠지만) 조금 불쾌했던 것 같아. 그때의 나는 아주 어렸고, 그 불쾌함을 나는 내 멋대로만 사는 망나니라 남들 도움 받기 싫나 보네!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돌이켜보면, 나는 내 존재 가치를 오직 내가 무엇인가 생산해 내는 행위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영어학원 비용을 지불할 수가 없어 남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꼴이 되었을 때 내 가치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 그렇게 불쾌하고 힘들었는가 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은 사랑을 꽤나 받고 자라, 남들에게 베푸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며, 인자한 미소를 지을 줄 알고, 가정교육 잘 받은 언행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더 배알 꼴리고 질투도 나고 짜증도 났고 말이지. 솔직히 지금도 젠체 하기는 싫다. 그냥 존나 짜증 나고 싫다. 누가 나를 보듬으며 너 일이 힘들지? 일을 하지 말고 집에서 편하게 쉬어. 내가 돈 벌어다가 줄게. 한다면, 마치 저기 혹시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고 보조기의 도움을 받아볼래?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이렇게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내가 배배 꼬여버린 것 알고 그런데 어쩌겠나. 뭐... 그냥 이렇게 돼버린 걸.


그리고 나는 (1) 일을 잘하고 조직에서 인정을 받고 있고, (2) 부수입도 많고 나를 반겨 주는 사람이 많고, (3) 사회생활/관계의 어려움 없이 잘 역할을 해내고 있으며, (4) 인간관계 전반이 무탈하고 오히려 원만한 편이다. 이상을 생각해 보면 굳이 나=너=우리 행복해요 미래를 함께 그려요 하고 있는 사람들 배알 꼴려서 질투하고 짜증이 날 필요가 없다. 후우... 그냥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불필요한 감정의 동요를 느낄 이유가 없다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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