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를 조심한 적이 없었다

회색인간의 육아기록

by 문영


친정아빠는 현관을 나서는 나에게 매일 <차 조심해>라는 똑같은 말을 했었다. 대답을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말은 큰 효용은 없었던 것 같다. 평소에 차를 조심해야겠지, 횡단보도를 건널 땐 좌우를 먼저 살피고 건너야겠지, 어떤 차는 신호위반을 할 수도 있겠지...라는 지각은 정말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저 말을 수백 번을 들었을 터인데 효과가 없었고, 20대 중반이 되어서 오토바이를 타다가 신호위반한 차에 100(상대)대 0(나)으로 들이 받히며 <빨간 불에 다니는 정신 나간 차도 있군>을 그제야 알게 되었는걸. 어린 시절 몸과 머리가 크느라고, 할머니의 정서적 학대를 내 안에서 처리하느라고, 조금 독특했던 ESTP 여성이 한국 사회에 맞추어 몸을 구기느라고, 어린 나는 나름대로 바빠서 그랬는지... 부모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몇 번 의문을 가진 적은 있다. 놀랍게도... <아빠는 똑같은 말을 하네? 왜 똑같은 말을 계속할까?>였다.


나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아이였다. 만약 <차 조심해>라는 네 음절을 매일 반복하는 것 대신, <신호를 어기는 차들이 이렇게나 많고, 교통사고로 하루에 다치는 사람이 이렇게나 있어. 네가 길을 제 신호에 건너더라도, 음주 운전하는 차에 부딪힐 수 있다는 말이야. 오토바이가 갓길로 다니기도 하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릴 때도 조심해야 돼> 수준의 단 1회의 설명이었다면, 나는 그 말을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20년간 차를 조심하며 다녔을 것이다. 어린 내가 차를 조심하지도 않고 <아빠는 왜 똑같은 말을 계속할까?>라는 이상한 생각이나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이런 기질의 인간이었다. 납득 가능한 설명이 필요한 인간. 자세한 정보가 필요한 인간. 유사한 사례가 하나 더 있는데,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투표자 정보를 잘 모르니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내 말에 부모님은 <그래도 투표를 해야지!>라고 외쳤고 그 기억은 나에게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왜 그럴까? 왜 저 말을 반복할까? 왜 이유는 없고 그래도 해야 하는 걸까? 반항은 아마 <= 0.01, 의문의 비중이 >= 99.99였을 것. 어리고 미숙한 나는, 할머니 난리통 속에 개인 플레이 하고 있는 원가족 분위기에서 여러 이유를 찾거나 다시 되묻지 않고 입을 닫았으며, 얼레벌레 시간은 지나갔다.


그리고 현재... 어제 이야기다. 헬멧을 쓰고 있는 오토바이 운전자 그림을 보며 아이가 묻는다. 다음은 나와 아이의 대화를 복기한 것이다.



아이(31개월): 왜 헬멧을 쓰고 있어?

나: 오토바이가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히면 크게 다치고 문제가 생기니까 그렇지

아이(31개월): 왜 머리를 부딪히면 문제가 생겨?

나: 숨 쉬는 것(한숨 쉬며), 보는 것(아이 눈을 만지며), 듣는 것(아이 귀를 만지며), 냄새 맡는 것(아이 코를 만지며), 모든 것들은 머리에서 하는 거야. 머리가 몸에서 제일 중요하거든. 예를 들어서 우리가 냄새를 맡잖아? 킁킁킁... 이 냄새는 어디로 가냐면, 슈욱, 이렇게 머리로 가는 거야. 아! 이건 맛있는... 복숭아 냄새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는 거야. 머리를 다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머리를 보호해 주는 헬멧이나, 공사장에서는 안전모를 쓰는 거야. 이해했니?

아이(31개월): (자기 머리를 만지며) 한 번 보고 싶다. 꺼내 보고 싶어. 머릿속에 들어가고 싶어.


여기서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느끼는 뇌>라는 책을 찾아 꺼내온다. 학부시절 사 두었던 책이다. 여기 어디에 뇌 그림이 있었는데... 아이랑 그림을 찾아서 본다. 이상하게 생겼지? 이게 머릿속에 있는 거야. 여기서는 숨을 쉬고, 여기서는 냄새를 맡아. 여기서는...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흥미가 떨어진 아이는 다시 로보카 폴리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나는 책을 대충 어딘가에 던져두고서 뭔지 모를 감정... 충족, 해방... 약간의 만족 등을 느끼게 된다.


아! 나는 이런 설명이 필요했어. 어린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어. 할머니가 폭군처럼 집안을 뒤집어 놓을 때, <그래도 할머니니까 모셔야지>나 침묵, 방관 같은 건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많이 힘들지?> 안아주는 것도 사실 어느 정도 필요했겠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말은 다음이었다고. <원래 늙으면 제대로 된 생각도 못 하게 되고, 성격이 더 표독스러워지기도 해. 너네가 힘든 것은 이해한다만 나는 부모를 버리거나 내칠 수가 없는 사람이며 오히려 할머니가 죽으면 제사를 매년 지낼 거야. 그렇지만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그것은 모르니, 네가 우리와 오래 살 수가 없겠다면 잘 준비해서 독립해>


이런 정도의 설명을 단 한 번만이라도 들었더라면 나는 해물탕이나 맥도날드에 수년간 집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고, 학부 성적이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았을 수도 있다. 박사과정 중 최저시급 아르바이트 한다고 새벽에 오토바이 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부모의 양육이 아쉽냐고 물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건 방어기제니 뭣도 아니다. 나는 지금 아이가 궁금한 것을 설명해 줄 때마다 이것들이 어렸던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이란 생각을 한다. 나는 어쩌면 아이를 돌보며 치유받고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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