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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탈 Sep 02. 2022

족보 자랑 함부로 하지 마라

순서 바뀌는 것은 순간

# 족보 자랑 함부로 하지 마라


서열 바뀌는 건 순간이니 함부로 족보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늙수그레한 가칭 '예총' 회원들이 촌티 물씬 풍기는 산골 음식점에 모였다. 연말에 있을 ‘이웃 돕기 자선음악회’를 논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의미 있는 행사다. 오늘은 색소폰 주자 세 명과 함께 자리를 같이했다. 


색소폰 연주자 세 명은 면에서 유일하게 개인 음악실까지 갖춘 행복한 형님, 함양에서 가장 비싼 색소폰을 연주하는 파출소 소장님, oo산업 본부장인 군 선배다. 색소폰도 불지 못하는 필자가 함께한다고 이상할 필요는 없다. 호객용 초청장도 쓰고 기타 폼 나게 둘러메고 사회 보는 역할을 맡았다.


소박한 음식과 각자 개인 취향에 맞는 술을 마시며 음악회 건은 신속하게 마무리한다. 과하지 않게 기분 좋을 만큼만 마시는 게 우리들 술 문화다. 오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물론 이분들 술자리가 짧은 진짜 이유가 따로 있긴 하다. 빨리 색소폰 연주를 하고 싶어서다.


안건은 대충 마무리하고 오늘도 어김없이 형님댁으로 몰려간다. 방음장치는 기본이고 값비싼 장비가 빼곡하게 들어찬 예총 멤버들 아지트다. 주거니 받거니 색소폰 합주와 독주가 이어진다. 

연주가 끝날 즈음 선배 시선이 한 곳으로 쏠린다. 형님이 애지중지하는 김해 김 씨 oo파 족보다. 선배가 족보를 이리저리 들춰보더니 갑자기 표정에 여유가 묻어나고 약간은 거만하게 허리가 뒤로 젖혀진다. 


여기서 지금까지 유지된 사회 서열을 정리하자면 형님, 파출소장, 선배 그리고 필자 순이다. 그렇다 보니 선배는 형님을 깍듯하게 선생님으로 예우했다. 그런데 미묘하게 변한 저 행동과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연인즉 나이 서열은 위와 같지만, 형님과 선배는 같은 족보에 올라 있고 항렬을 따져보니 선배가 형님보다 한참 빠른 것이 아닌가. 반전이다. 형님은 얼굴이 불그스레 변하고 형님을 향한 선배의 호칭은 반 하대로 변해 있다. 말투, 표정, 행동이 갑자기 달라지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다.

상황을 정리코자 둘러앉아 이유를 살핀다.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논쟁거리는 형님 쪽은 대를 정상적으로 이어왔는데, 선배 쪽은 여태껏 뭘 했냐는 것이다. 이럴 때 당사자들은 객관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하여,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형님 쪽이 정상이고, 선배 쪽은 어느 대에선가 사랑 표현에 서툴렀네."

"········"

족보 자랑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특히, 씨족 간 위계질서가 확실한 시골에서는 삼가야 할 일임이 분명하다. 주변에 서열에 민감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사족)

지금도 예총이 활발하게 활동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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