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팜사이더
도시 탈출에 성공해 귀농인이라는 훈장을 달았음에도 농사일은 제켜두고 농장 주변을 서성거려야만 한다면 서럽고도 서글픈 일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준비하고 자발적이어야만 한다.
토막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제 침탈 이후 발생한 도시빈민의 집단 주거지로, 하천부지나 임야 등을 무단 점거하여 지은 허술한 움막을 일컫는 말이다. 일제에 농토를 강탈당하고 쫓겨난 농민들이 구성원인, 가난이 집단화된 불행한 역사 속 흑백 필름이다.
달동네라는 낭만적인 이름은 중년 이후라면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다. 사회로부터 홀대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산다는 점에서 토막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군사정권이 추진한 급속한 경제개발정책이 낳은 어두운 이면으로, 반 강제적 이농현상에 따라 도시로 유입된 가난한 농촌주민이 주 구성원이란 점에서 토막촌과는 다른 듯 닮아있다.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그럴듯한 이름이지만, 그 속에 살던 사람들 역시 집단화된 가난 속에 묻혀버린 시대의 희생양이다.
토막촌이나 달동네에 살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집단화된 도시빈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의 문제는 개인적이기보다 정치적으로 상당 부분 강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토막촌과 달동네 사람들 문제는 동시대를 살던 자 모두의 책임이며, 특히 국가는 그 책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잘못된 역사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의무다. 그럼에도 최근 수년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별다른 의심 없이 진행되고 있다. 목적지는 정반대지만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동인은 유사한 사회현상 말이다. 소위 베이비붐 세대의 이도현상을 마치 시대의 흐름 인양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귀농이란 이름으로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찬양에 가까운 수식어를 동원하는 선동가도 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이 문제도 언제나 그렇듯 가진 것 없이 오롯이 맨몸으로 삶을 지탱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던 농부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시 외곽 달동네로 흘러들어 도시빈민으로 살았듯, 도시라는 전쟁터에서 찢기고 상처 입어 떠밀리듯 시골을 택한 사람들은 자칫 팜사이더가 되어 유령처럼 시골 산하를 떠돌지도 모른다. 농부를 꿈꾼 자들이 농사 외적인 일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을 때 느끼는 박탈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지며, 자괴감에 고개 숙인 채 끊임없이 자학한다. 먼 여행길에 목적지를 잊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하고 만다. 가끔 출발지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도 일지만, 그 길도 나아가는 것 못지않게 어렵긴 마찬가지다. 이들이 도시를 떠난 이유는 그 수만큼이나 많겠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농부가 되고자 했던 소박한 꿈에서 멀어져 갈 때 느끼는 상실감은 동일하다. 그 크기가 기대치에 비례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팜사이더를 과연 개인적인 문제만으로 치부할 것인가? 과거 달동네 사람들을 양산했던 ‘잉여인력의 재배치’라는 음모론적 권력의 의도가 숨어 있다면 어쩔 것인가? 지나친 비약인가? 이 같은 의구심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준비된 자들이 자발적으로 도시를 탈출해야만 한다.
사족)
* 팜사이더(farmsider) : farmer + outsider. 귀농인이면서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농사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일용직 등 농사 외적인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 (필자 정의)
* 도시 탈출을 부추기는 글을 쓰겠다면서, 팜사이더라는 민감한 주제를 먼저 다루는 이유는 귀농 귀촌은 반드시 준비되고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자발적과 반 강제적이라는 경계선이 불분명할 수도 있지만, 누구든 주어진 선택지를 받아 들었다는 사실은 전자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