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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17. 2020

그림 같은 집과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라는 낯선 공포

영화 <비바리움(2019)>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바리움(Vivarium)>(로칸 피네건, 2019)은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미장센이 인상적인 영화다. 그러나 영상의 미학적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영화의 주제와 스토리는 소름 끼치게 섬뜩하다.      


마그리트의 그림(우)을 연상시키는 미장센(좌)


장르적으로는 ‘SF 미스터리 호러’라고 하는데, 실상 이 영화는 은유와 상징들로 표현된 현실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현대인의 내적 두려움을 건드린다. 완벽한 안식처로서의 내 집 마련과 육아의 의무, 반복되는 일상과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무의미한 노동, 삶의 전형성과 몰개성의 시대 등. 이것이 영화 <비바리움>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낯선 공포의 실체다.      




영화의 제목 ‘비바리움(Vivarium)’관찰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동물이나 식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영화에선 함께 살 집을 구하던 남녀 주인공 톰과 젬마가 예기치 않게 갇혀버리는 ‘타운하우스 욘더(Yonder)의 No.9 주택’이 바로 비바리움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마을과 불태워도 사라지지 않는 집에서 이들은 미지의 존재에게 관찰당하고 사육된다. 그리고 이들에겐 하나의 미션이 주어지는데, 이곳을 나가고 싶다면 박스에 배달된 아이를 성장할 때까지 잘 키우라는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마을 욘더(Yonder)


톰과 젬마가 자신들의 아이도 아닌 누군가의 아이를 억지로 돌봐야만 하는 상황에 던져졌을 때, 관객은 자연스레 영화의 첫 장면인 뻐꾸기의 탁란 영상을 떠올리게 된다. 감독은 둥지(집)뻐꾸기 새끼(아이)가 등장하는 이 첫 장면에서 뒤에 펼쳐질 주인공들의 처지를 교묘히 암시한다. 인트로의 강렬한 인상은 영화를 보는 내내 불길하게 작용한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자신의 새끼를 다른 새가 대신 기르게 하는 방식으로 종족 번식을 한다. 알에서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본능적으로 원래 둥지에 있던 알과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어미 새는 뻐꾸기가 자신의 새끼인 줄 알고 정성을 다해 키우지만, 어미보다 덩치가 커진 뻐꾸기 새끼는 끊임없이 먹이를 갈구하며 울부짖는다. 귀에 거슬릴 정도로 증폭된 뻐꾸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어미 새를 잡아먹을 듯이 벌리는 뻐꾸기의 큰 입. 이 장면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오싹한 비명을 지르는 아이와 급하게 밥을 챙겨주는 톰과 젬마의 모습에 오버랩된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아이는 뻐꾸기와 어미 새가 다른 종(種)인 것처럼 아이가 인간과는 다른 종(種)임을 추측하게 한다.    


끊임없이 먹이를 갈구하는 뻐꾸기 새끼(좌), 오싹한 비명을 지르는 아이(우)

 



톰과 젬마는 비바리움인 이 집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가 성인이 되면 애초의 조건대로 풀려날 수 있을까? 이들을 사육하고 아이를 떠넘긴 존재는 대체 어떤 종족인 걸까? 영화는 이 질문들을 이렇게도 바꿔 생각해보게 한다. 과연 우리의 현실은 비바리움과 다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또는 누구를 위해 자유를 희생하고 있는가? 이러한 희생은 과연 보상을 받을 것인가? 죽음 외에는 벗어날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곱씹어볼수록 무섭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림 같은 집’에서 부모의 희생과 돌봄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라는 개념은 이상적이지만, 그 자체로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공포스러운 구석이 있지 않은가.     


<비바리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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