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이것은 일어났던 일이고,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by 이연미

멀리서 보면 마치 수천 개의 관들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베를린 도심 속에서 유독 정적이 흐르고 밤에는 서늘한 기운마저 서려 있는 곳, 이 곳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로 전체를 뜻하는 hólos와 불에 태운다는 뜻인 kaustós가 합쳐진 단어로, 고유명사로 쓰이면 제2차 세계대전(1933~1945) 중 독일 나치에 의해 집단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한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 수용소와 강제 노역, 가스실 등 인간의 잔혹함과 폭력성의 끝을 드러내어 인류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되었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추모 공원은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이 1만 9073제곱미터의 부지(축구장 3배 크기) 위에 2,711개의 콘크리트 추모비를 세워 완성했다. 별도의 입구 없이 사방에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열린 공간 같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그 ‘개방성’이 사라져 버리고 출구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20170830_094053.jpg 높은 콘크리트 기둥이 격자로 놓여있는 좁은 간격의 길


높이가 제각각인 사각기둥은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간격으로 촘촘히 늘어서 있다. 들어갈 때는 무릎 높이 정도였던 기둥은 중앙으로 갈수록 어느새 사람 키보다 높아지고 점점 압도적인 벽이 되어 옥죄어 온다. 위를 올려다보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좁은 하늘이 보이지만 조금도 희망적이지 않다. 잿빛의 차가운 콘크리트는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미로 같은 좁은 통로는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듯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_futuretravel.png *출처_future travel
“적절한 크기의 질서 정연한 체계가 너무 크게 확대되어 원래의 의도된 비례를 벗어나게 될 때, 인간 이성의 상실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이 격자 체계는 내재적인 혼란과 질서 있게 보이는 모든 체계에 잠재된 혼돈의 가능성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 피터 아이젠만의 인터뷰 발췌 -




추모 공원의 바로 아래 지하 공간에는 대학살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거시적 관점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의 역사를 조망하기보다는, 그 비극 속을 살아야 했던 개개인의 삶과 기억을 조명한다. 그들이 남긴 기록의 조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슬픔과 분노가 켜켜이 쌓여 어느새 감당하기 벅찬 참담함에 사로잡힌다. 전시실 한 켠에는 유대인 가족의 초상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 옆에는 이들 중 희생된 자와 살아남은 자가 구분되어 표시되어 있다.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수용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한때는 평화로웠던, 가족의 사진 앞에서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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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_ exploringworld.com


전시장 초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홀로코스트 증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글이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이것은 일어났던 일이고,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이것이 우리가 말해야 할 핵심이다.)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법정에 선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에 담당 검사는 아이히만에게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를 물어 사형을 구형했다.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모두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의외로 평범하다’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한 사람의 극단적 이념에서 시작된 집단의 광기가 실은 우리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 이렇게 끔찍한 일도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기에', 과거의 기록과 증언을 통해 끊임없이 현재를 '의심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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