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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l 25. 2019

'내 이름은 로제타' 그리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로제타(1999)>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닮은 듯 다른 영화 <로제타(1999)>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로제타>를 보면서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오른 건 아마도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


네 이름은 로제타, 내 이름은 로제타.
넌 일자리가 생겼어. 난 일자리가 생겼어.
넌 친구도 생겼어. 난 친구도 생겼어.
넌 평범한 삶을 산다. 난 평범한 삶을 산다.
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난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잘 자. 잘 자.


주인공 로제타가 친구 리케의 집에서 잠을 청하며 혼잣말로 속삭이는 장면이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되뇌는 이 부분에서 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유명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가 관공서 건물의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낙서를 남기는 장면이다. 그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에 확인시키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로제타>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스틸컷


<로제타>의 주인공은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일자리가 간절한 열여덟 살 소녀이다. 트레일러에서 임시 생활을 하며 캠핑장 관리자 몰래 물고기를 잡아 요리해먹고, 헌 옷을 주워 판 변변치 않은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반면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생을 목수로 일해 온, 지금은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의사의 휴직 처방을 받은 노년층의 인물이다. 나라에서 생활보조금을 받아야 하는데 절차는 복잡하고 관료주의에 젖은 공무원들은 냉담하다. 둘은 실업의 문제에 직면해 있고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회적 약자라는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비정규직 일자리에서마저 번번이 쫓겨나 최소한의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로제타 쪽이 더 절박하다.


영화 <로제타>는 벨기에의 청년 실업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앞뒤 상황 설명 없이 로제타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다. 그래서 관객은 조금은 답답하게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 곱씹어 볼 때에야 로제타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로제타의 삶을 밀착 관찰한 결과는 허우적거려도 빠져나오기 힘든 진흙탕이다. 로제타가 그토록 바라는 떳떳한 직업과 친구가 있는 평범한 삶은 로제타에게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보다는 관객에게 조금 더 친절하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다니엘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한다.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영국의 사회보장 시스템에서 어이없는 이유로 소외되는 대상들의 현실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속에서 자존감을 지키며 힘들게 투쟁한 끝에 다니엘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그래도 가깝게 다가간다. 로제타의 상황보다는 희망적이다.


좌: 로제타와 리케 / 우:  다니엘과 케이티 가족 *출처_Google


두 영화에는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거나 그공감하는 친구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로제타>의 리케는 와플 가게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 직원으로 로제타의 사정을 이해하고 먼저 다가가는 인물이다. 둘은 친구를 거쳐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 같았으나 어느 순간 하나의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경쟁자가 된다. 와플 가게에서 반죽하는 일마저 사장의 아들에게 빼앗기고 쫓겨나자, 로제타는 리케의 부정을 사장에게 밀고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로제타에게 일자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들어야 하는 생존의 문제였고, 우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와플 가게에서 쫓겨날 때 로제타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밀가루 포대를 붙들고 매달린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아이 둘의 미혼모 케이티가 다니엘의 친구를 넘어 가족과 같은 존재로 나온다. 안타깝게 대립하는 로제타와 리케와는 달리, 이 둘은 방황을 할 때 서로를 붙잡아주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역경의 시간을 함께 헤쳐 나간다. 영화는 다니엘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따뜻하게 기억되는 이유다. 다니엘의 장례식에서 케이티는 다니엘이 남긴 서명서를 대신 낭독하며 그가 준 교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My name is Daniel Blake,
I am a man, not a dog.
As such, I demand my rights.
I demand you treat me with respect.
I, Daniel Blake, am a citizen,
nothing more, nothing less.)


반면에 <로제타>는 영화 마지막까지 참담하고 서늘한 인상을 풍긴다.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엄마를 보고 절망한 로제타는 죽기로 결심하고 가스 밸브를 열어놓지만 가스가 부족해 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새 가스통을 구입해 힘들게 나르는 로제타 앞에 리케가 자살의 훼방꾼처럼 나타난다. 또다시 찾아온 복통으로 무거운 가스통과 함께 쓰러진 로제타는 그때까지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린다. 그런 그녀를 리케가 일으켜 세워주고 둘이 마주 보면서 영화는 갑작스럽게 끝이 난다.   


이후에 로제타는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다니엘의 죽음 이후에도 케이티는 다니엘의 영웅적인 행위를 본받아 아이들과 꿋꿋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로제타도 그녀 특유의 억척같은 생활력을 발휘해 다시 삶으로 돌아왔을까? 그 과정을 리케가 곁에서 지켜보며 로제타에게 힘을 보태 주었을까? 다니엘과 케이티가 연대의 힘을 발휘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보다 조금은 희망적인 미래가 펼쳐졌기를 바란다. 그래서 리케의 집에서 로제타가 보여주었던 그 웃음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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