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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Apr 28. 2021

봉황으로 태어나 난조로 살아야 했던, 섭은낭

영화 <자객 섭은낭> (2015)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자객 섭은낭>(허우 샤오시엔, 2015)은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다. 흑백의 화면에 흑과 백의 복장이 대비되는 두 여인이 등장한다. 단검을 건네며 살인을 명하는 흰옷의 여인은 여도사(가신공주)다. 그 곁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검은 옷의 여인’이 바로 자객 섭은낭이다. 


흑백화면이 인상적인 영화의 첫 장면


은낭은 ‘하늘의 새를 쏘듯’ 날렵하게 첫 번째 암살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암살에서 그녀는 실패한다. 아니, 살해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아들을 품에 안고 잠이 든 권력자에게서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완벽한 검술에 비해 마음이 약한 게 문제로구나.” 여도사의 말처럼 은낭은 자객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객답지 않은 인상을 풍기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단호함보다는 망설임이 많은 자객. 과감하게 얼굴을 노출하는 자객이지만 속마음은 미스터리인 은낭. 영화는 베일에 싸인 은낭의 정체를 추적해나가며 무표정한 얼굴 속 감춰진 그녀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려 낸다.     


은낭에게 과거 연인 전계안의 살인을 명하는 여도사




사실 은낭은 과거 위박의 현 절도사인 전계안의 정혼자였다. 은낭과 계안에게 정혼의 표식으로 옥결을 하사했던 계안의 어머니 가성공주는 아들의 왕위 세습을 위해 은낭과의 약속을 저버린다. 그리고 은낭을 자신의 쌍둥이 자매인 가신공주에게 맡긴다. 그렇게 은낭은 부모와 떨어져 외딴곳에서 홀로 자객으로 키워졌다. 그래서일까? 은낭은 황실을 떠나 변방 위박으로 시집와서 벗이 없다는 가성공주의 딱한 처지를 마음 깊이 이해한다. 어렸을 때 헤어진 어머니와 상봉하고도, 옛 연인인 계안을 만나고도 감정의 흔들림을 내보이지 않던 은낭이 유일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가성공주를 회상할 때다.     


가성공주를 회상하는 장면
거울을 본 난조는 슬피 울기 시작하더니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밤새껏 춤을 추었다


가성공주에게 칠현금을 배울 때, 은낭은 ‘춤추는 푸른 난조’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족을 보아야 운다는 난조. 그 난조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왕이 거울을 갖다 두었더니 밤새껏 슬피 울며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 가성공주는 자신이 ‘푸른 난조’ 같다고 말했고, 은낭은 자신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은낭이 또 다른 자객, 가면 쓴 여인을 맞닥뜨렸을 때, 동족을 본 난조처럼, 거울 속 자신을 본 것 같은 아픈 각성에 속으로 울음을 삼켰을지도 모른다. 


계안은 과거 은낭이 숲속에서 머물 때, 마치 봉황 같았다고 회상한다. 봉황으로 태어났으나 난조로 살아야 했던, 자객 섭은낭. 그녀의 무예가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은 내면의 슬픔이 차고 넘쳐서 외부로 표출된 춤이었기 때문이었던 걸까.  


    

무협이라기보단 차라리 예술에 가까운 영화


영화의 마지막에 은낭은 계안을 살해하라는 여도사의 명을 거절한다. 왕의 죽음은 위박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유를 대지만, 아마도 은낭은 가성공주의 옥결(‘결의’의 뜻)에 담긴 약속을 지켜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숙고 끝에 내린 굳은 결의. 이제 검이 아닌 신념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는 선언. 스승의 무예를 이미 뛰어넘은 은낭을 스승은 막지 못한다. 고국을 떠나 신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한결 홀가분해 보이는 건, 그녀가 마침내 거울에 갇힌 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미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자객 섭은낭> 포스터



*사진 출처: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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