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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Apr 04. 2021

정체성의 정체를 질문하는 책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민음사, 1998)을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얼굴 없는 신사가 그려진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이 소설의 정체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는다. 분명 이야기는 끝났는데,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소설의 제목은 왜 <정체성>일까? ‘정체성’에 관해 이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걸까? 작가는 왜 소설의 결말에 ‘꿈’을 배치한 걸까? 정체성과 환영(꿈) 사이의 모호함이 작가의 의도인 걸까?     




사전에서 ‘정체성(Identity)’을 찾아본다.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적혀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상당 기간 동안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로서의 자기에 대한 경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불변성, 독립성, 일관성, 고유성! 위의 정의에 따르면 ‘정체성’은 이보다 명료할 수 없는 확실한 개념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불확실한 정체성으로 혼란의 시간을 겪고 있는 샹탈은 어떻게 된 것인가? 샹탈은 아이의 죽음 이후 남편과 이혼하고 현재는 애인 장마르크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경제적 독립을 위해 직업도 바꿨고 직장과 집에서 ‘두 얼굴’로, 즉 이중적인 자아(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이중배반자(p.35)’)로 살아가고 있다. 최근에 그녀는 남자들이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울슬픔을 느낀다. 열예닐곱 살에 가슴에 품었던 장미 향의 은유는 말라비틀어져 권태로 뒤덮힌 백색의 장미가 된 지 오래다.    

  

장마르크도 상황이 나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신을 주변인, 집 없는 사람, 노숙자(p.162)’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샹탈이 그의 곁에서 그와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어주고 있지만, 그녀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자 그 또한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녀가 환영이라면 장마르크의 모든 삶이 환영일 터(p.116)’이기 때문이다. 그는 샹탈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주겠다며 ‘C.D.B’(시라노)라는 가상의 존재를 통해 그녀에게 구애 편지를 쓴다. 하지만 편지를 받은 이후의 샹탈의 모습은 그가 느끼기에 더욱 그녀답지 못했고 장마르크는 자신이 만든 가짜 자아를 질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정체성의 대혼돈이다.     


편지의 배후 인물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된 샹탈은 배신감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p.155)’기로, 실종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에게 사랑의 실패는 자아의 실종이나 다름없었다. 샹탈의 모험이 시작되고 장마르크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이후 소설은 ‘이것은 꿈이었다’ 식의 급작스러운 결말을 맺는다.   



    

꿈이라고? ‘삶(소설)의 모든 폭을 무화’(p.11)시키는 꿈? 독자의 혼란을 예견한 듯 작가의 사색이 바로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생각해 본다.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 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 삶이 이런 뻔뻔한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p.181-182)’ 작가는 질문을 던질 뿐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등장인물들이 정체성과 낯선 환영 사이에서 삶의 길을 잃고 헤맨다면, 독자는 이 소설에 펼쳐진 현실과 꿈의 모호한 경계에서 혼란에 빠진다. 정체성에 대한 답도, 소설의 결말에 대한 답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또 다른 저서 <커튼>(민음사, 2008)에서 ‘지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사색을 소설 속에 통합하는 것’을 현대의 소설가가 감행할 수 있는 ‘가장 대담한 혁신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소설의 사색은 판단을 내리지 않고 진리를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질문하고 놀라고 탐색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삶의 마술적 궤도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삶이야말로 그것을 살찌우고 정당화하는 것이니까(p.100).’라고 덧붙였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삶의 단편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졌고 스스로 답을 탐색하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보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것이 비단 샹탈과 장마르크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가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에게 기대하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이란 일종의 망상(꿈)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체성은 결코 완결된 형태의 것이 아니고 세상과 부딪히며 탐색해 가는 것, 인간관계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소설의 중간에 한 개인의 정체성이 집결되는 점으로 ‘눈’을 이야기하는 구절이 나온다. 동시에 이 ‘눈’은 눈꺼풀의 세척 운동으로 유지 보수해야만 하는 시각 도구라고 말한다.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스스로 구축해나가면서 타인과 나의 관계성 속에서 끊임없이 유지 보수해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언급한다. 샹탈은 왜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 특히 남성(주변의 남자들, 전남편, 애인)의 시선에서 정의하는 걸까? 그녀의 자아는 왜 독립적이지 못하고 사랑의 실패에 쉽게 실종되고 마는 나약함을 보일까? 작가가 개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여성 자아의 위상에 어떤 한계를 그어놓은 것은 아닌지, 삶의 의미를 너무 사랑 하나에 침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밀란 쿤데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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