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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y 03. 2021

그녀의 닫힌 문

서보 머그더의 <도어>(프시케의 숲, 2019)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보 머그더의 소설 <도어>(프시케의 숲, 2019)는 소설 속 화자인 ‘나’의 꿈에서 시작해서 꿈으로 끝난다. ‘나’는 언젠가부터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꾼다.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굳게 잠가 버린 문. ‘나’의 꿈속에서 ‘닫힌 문’은 환자를 구할 가능성을 가로막지만, 동시에 ‘나’의 끔찍한 배신도 막아준다. ‘나’에게 악몽은 오히려 위안이고, 꿈에서 깨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공포일지도 모른다. “꿈은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라고 프로이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화자가 그렇게 간절히 구하고 싶었던 사람은 에메렌츠다. 그녀는 작가인 ‘나’의 집안일을 20여 년 동안 돌봐준 가정부다. 두 여성은 오랜 세월 애증이 뒤섞인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며 남다른 유대감을 쌓는다. ‘나’의 꿈에 등장하는 ‘닫힌 문’은 사실 에메렌츠의 집이다. 불행과 비극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낸 에메렌츠는 그 누구도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 세상과 인간으로부터 그녀는 마음을 닫았고 그렇게 문도 닫아 버렸다. 어쩐지 그 문이 열리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처럼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닥칠 것만 같은 불길함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감돈다. 


소설에서 이 금단의 문은 딱 두 번 열린다. 한 번은 에메렌츠 스스로가 ‘나’를 믿고 문을 열어 그녀를 안으로 들인 것이고, 두 번째는 ‘나’와 마을 사람들이 협동하여 문을 강제로 부순 것이다. 에메렌츠의 닫힌 문은 오직 ‘나’에게만 열렸다. 사람도, 동물도 “너무 좋아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p.229)라고 했던 그녀가 ‘나’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이 우정이, 사랑이, 신뢰가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될 줄은 그녀도 ‘나’도 몰랐다.  


에메렌츠의 문이 ‘나’의 작전으로 강제로 열린 순간부터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에메렌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선의에서 벌인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지도 그녀를 보호해주지도 않은 배신자가 된다. 닫혀 있는 문 뒤에 자신을 유폐하면서까지 에메렌츠가 지키고자 했던 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것들과 인간적 존엄이었다. 에메렌츠를 구하고자 했던 나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녀의 삶의 토대를 파괴하고 그녀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내 파멸시킨다.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p.10)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순 없었을까? 이미 ‘나’에게 한 번 열렸던 그 문을 조심스럽게 다시 두드려볼 순 없었을까?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은 문이 앞에 있는데도 항상 뒤로 들어가려고만 해요. 앞문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이 단순한 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p.202) 에메렌츠의 말처럼, 어쩌면 ‘앞문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단순하지만 솔직한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메렌츠의 방식을 거스르기보단 존중하면서 그녀를 지켜낼 방법을 더 골똘히 고민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착잡한 여운을 남기는 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미숙함으로 끝내 실패하고 마는 타인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타인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관계를 갈망한다. 이야기의 끝에서 화자의 남편은 화자에게 다른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한다. 그녀가 이 긴 고해성사를 통해 미약하나마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졌기를, 그래서 이번엔 상대방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애도와 참회의 시간을 보낸 뒤엔 그녀가 꿈속의 저 갇힌 순간에서 벗어나기를,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를 바란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녀를 ‘연민에 겨운 동정심’(p.203)으로 바라보는 에메렌츠의 얼굴이 떠오른다. 에메렌츠라면 ‘나’를 벌써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았을까.


서보 머그더 <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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