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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Aug 22. 2021

강호의 위태로운 남녀

영화 <강호아녀> (지아장커, 2018)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호아녀>의 차오(자오 타오)는 17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옛 연인 빈(리아오판)을 기차역에서 맞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빈은 반신불수가 되어 휠체어 신세다. 두 사람은 휠체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트럭 뒤 칸에 타고 다퉁 시내를 달린다. 도시는 야속하게도 빈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번듯하게 재개발되어 있고, 그 와중에도 기억 속의 장소는 그 자리 그대로여서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말을 잃은 채 뒤에서 부는 바람을 맞는 차오의 표정이 복잡하다. 그 순간 차오의 머릿속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내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호의 남자와 그의 연인


과거 빈은 다퉁 지역의 조직 보스였고 차오는 그의 연인이었다. 그녀는 꽃과 나비가 수 놓인 화려한 의상을 입고 조직원들에게 형수님이라 불렸다. 이때만 해도 빈은 강호의 강자가 인생의 목표였고 차오는 그와 가족을 이루는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빈은 차오에게 ‘사람이 있는 곳은 다 강호’라며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호의 세계로 그녀를 이끈다. 그녀의 손에 연습 삼아 들렸던 총이 실제로 발사되었을 때, 그녀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차오는 빈의 목숨을 구했지만, 불법무기소지죄로 5년 형을 선고받는다. 반면에 빈은 1년의 징역살이 후 출소하지만 차오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잠적한다.    


지금 너도 강호에 있어.
사람이 있는 곳은 다 강호야.

 

강호를 떠돈 여자와 강호를 떠난 남자


5년 만에 출소한 차오는 빈을 찾아 헤매다 싼샤에까지 오게 된다. 싼샤는 싼샤댐 건설로 곧 수몰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한 지역이다. 베이지색의 수수한 옷차림을 한 그녀는 더는 조직의 안주인이 아니다. 도둑질과 강간,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바깥세상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그러나 강호를 떠돌면서 그녀도 나름의 처세술을 터득했다. 거꾸로 상대방을 협박하고 사기 치고 허위 고소를 하며 비열한 세상과 맞선다. 차오는 어렵게 빈을 다시 만나지만, 빈은 자신은 강호를 떠났다는 말로 그녀의 신의를 저버린 것을 변명한다. 과거를 청산하고 다른 여성과 새 삶을 살고자 하는 그를 그녀는 아프게 놓아준다. 2000년 도시가 2년 만에 수장되듯 과거의 단단했던 관계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난 강호를 떠났어. (빈)
근데 난 당신을 찾으려고 강호를 떠돌았어. (차오)



강호의 의로운 여인과 그녀의 연인


세월이 흘러 차오는 다퉁에서 빈이 운영하던 도박장의 여주인이 되어 있다. 다리를 잃고 돌아온 빈을 조롱하는 옛 조직원을 차오는 찻주전자로 내리치며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빈과 차오의 입장이 역전되었지만, 빈을 비웃지 않는 건 그녀뿐이다. 예전에 차오는 화산을 배경으로 빈에게 말했다. “고온에서 연소된 거니까 재가 가장 깨끗할 것”이라고. 17년의 세월 동안 세상의 거친 불길에 수없이 단련되었을 차오는 연소된 재나 다름없다. 차오는 그녀를 배신했던 빈을 받아주며 끝까지 강호의 의리를 지킨다. 영화의 영문 제목인 <Ash is purest white>처럼, 재가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존재임을 그녀는 몸소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 어느 정도 회복된 빈은 그녀의 곁을 또다시 떠난다. 절뚝이며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도, CCTV에 담긴 남겨진 그녀의 모습도 위태로워 보인다. 


얼마나 많은 사랑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기다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랑이 이미 변해버린 그때도
사랑할 용기가 남아 있을까





지아장커 감독을 일컬어 ‘사라져가는 것들을 응시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스틸 라이프(2006)>, <천주정(2013)> 등의 작품에 이어 감독은 이번에도 중국의 변화와 그 이면의 갈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강호아녀>의 배경인 2001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 사회는 극적인 변화를 이뤘다. 초고속 성장에서 과거의 중요한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잊혔다. 다퉁시는 불도저식 도심 재개발로 곳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고, ‘현대판 만리장성’이라고 불리는 싼샤댐 건설은 13개 도시, 1500여 개 마을을 수몰시켰다. 이 두 지역에서만 엄청난 숫자의 이주민이 발생했다. 


금전 지상주의에 빠진 중국인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공동체의 해체와 관계의 상실을 겪었다. 누군가는 변화의 흐름을 좇아 치열하게 살았지만 외려 두 다리로 설 자리를 잃었고, 다른 이들은 미련하게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다 뒤통수를 맞았다. 영화에서 빈이 점진적으로 다리를 잃고 차오가 색을 읽어가는 것은 감독의 의도된 연출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뒷전인 사회에선 도저히 낙관적인 미래를 그릴 수가 없다. <강호아녀>를 통해 지아장커 감독은 현대의 중국에 질문하는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고. “소중함을 깨닫고 난 뒤 돌아와도 그 사랑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겠어.” 영화에 삽입된 노랫말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영화 <강호아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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