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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12. 2021

이토록 진지한 질문,
이토록 매혹적인 이야기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민음사, 2011)을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민음사, 2011)은 ‘나는 왜 나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소설이다. 동시에 작가는 17세기 동서양 문명이 충돌하는 터키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쌍둥이/분신’ 모티프, ‘서로의 신분을 바꾼 두 사람’이라는 문학적 테마, ‘거울’과 ‘하얀 성’ 등의 환상적인 상징,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서사적 장치를 다채롭게 활용하여 독자를 매혹하는 신비로운 이야기 한 편을 완성했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베네치아의 젊은 학자로 나폴리로 항해 도중 터키 함대에 붙잡혀 포로가 된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잡다한 지식을 활용하던 ‘나’는 어느 날 자신과 외모가 쌍둥이처럼 닮은 오스만인을 만난다. ‘호자’(이슬람교에서 교사나 지식인을 부르는 말)라고 불리는 그는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동경했기에 ‘나’를 노예로 삼아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두 사람은 긴 세월 한집에 살면서 천문학, 생물학부터 점성술과 상상의 동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주제를 함께 토론하고 연구한다.      


‘주인-노예’ 관계이지만 주인(제자)이 노예(스승)에게 의지하는 역전된 모습을 띠면서 호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왜 나는 나일까?’(p.74) 호자가 떠올린 이 물음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자신의 단점을, 심지어 살면서 지은 죄까지 모두 기록하여 공유하게 된다. 두 사람은 점차 외양뿐만 아니라 행동과 생각까지 닮아가며 서로 동화된다. 거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보고 ‘나’는 ‘우리 둘은 같은 사람’(p.105)이라고 느끼고 호자는 “나는 네가 되었어!”(p.107)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흑사병이 돌고 죽음의 공포로 두 사람이 대립하면서 서서히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황실 점성술사의 자리에 오른 호자는 파디샤를 포함한 오스만인들은 모두 어리석다고 혐오하며 ‘그들’과 ‘우리’를 끊임없이 경계 짓는다. 반면에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는 태도를 보인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개발한 무기가 전쟁터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하얀 성’을 정복하는 데 실패하자,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은 서로의 신분을 바꾸기로 한다. 그렇게 호자는 자신이 선망하던 이탈리아로 떠나고 ‘나’는 호자를 대신해 오스만 제국의 황실 점성술사로 살아간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같음과 다름’ 사이에서 자기 상실과 회복의 긴 여정을 거쳐 각자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새로운 삶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 자유를 찾았고 호자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언젠가 ‘나’와 호자는 파디샤를 위한 이야기를 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이야기란 처음 부분은 동화처럼 천진난만해야 하며, 중간 부분은 악몽처럼 무서워야 하고, 마지막 부분은 이별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처럼 슬퍼야 한다’(p.121)고. 두 사람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여기에 딱 들어맞지 않을까. 이탈리아로 간 호자도, 오스만 제국에 남은 ‘나’도 상대를 그리워하며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썼으니 말이다. 소설의 끝에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묻는다. “서로의 삶을 바꾼 그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p.193) 어쩌면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소설의 앞에서 간접적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훗날 온전히 받아들일 만큼 좋아해야 한다. 물론 나는 지금 이 인생을 좋아한다.’(p.81)     



 

놀라운 건,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의 이야기’(p.192)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 이야기가 적힌 필사본을 발견한 가상 인물을 설정해 서문을 쓰게 했다. 그리고 소설의 끝에 후일담처럼 이 이야기의 첫 독자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야기에 새로운 층위를 더하는 이러한 장치는 독자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과연 필사본을 쓴 사람은 ‘나’일까 호자일까, 아니면 서문을 쓴 ‘파룩’이 지어낸 이야기일까? 호자와 ‘나’는 실제로 쌍둥이처럼 닮았던 걸까, 아니면 닮았다고 착각한 걸까? 두 사람이 애초에 한 사람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작가는 철학적인 질문에 문학적인 은유와 상징을 뒤섞어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존재’(p.180)인 하얀 성 같은 이야기를 지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지만, 상상에 상상은 계속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내가 떠나온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내가 되고, 나는 그가 되기를 원했다.” (p.108)


오르한 파묵 <하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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