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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Sep 23. 2021

나의 이야기를 완성할 용기

영화 <그린 나이트>(데이빗 로워리, 2021)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기사로 거듭나기 위한 여정의 출발치고 그 행렬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말을 탄 가웨인의 뒤를 따르는 건 장난삼아 목검을 휘두르는 동네 꼬마들뿐이다. 이 장면은 왕국과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모험 한 번 해본 적 없는 미성숙한 가웨인의 현재 상태를 암시하는 걸까? 여태껏 나약하고 나태한 모습만 보여줬던 그가 과연 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관객은 의심과 기대 속에서 영화 <그린 나이트>(데이빗 로워리, 2021)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가웨인은 끝내 왕에게 들려줄 무용담을 완성하고 기사의 신분을 얻을 수 있을까?  





이야기의 시초


이야기의 시작은 일 년 전 크리스마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가 모인 축제의 자리에 녹색 기사가 들이닥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녹색 기사는 크리스마스 게임을 제안하고 자신의 목을 베는 용맹한 자는 영예와 재물을 얻을 것이라 말한다. 단 이 게임엔 조건이 있으니, 도전자는 정확히 일 년 후에 녹색 예배당으로 찾아와 역으로 녹색 기사의 도끼를 받아야 한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임이다. 


이에 무용담 하나 없이 자리를 함께했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던 가웨인이 무모하게 나선다. 왕에 대한 충성심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그를 부추겼지만, 사실 이 게임은 왕의 누이이자 마녀인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짜놓은 판이었다. 대결은 가웨인이 단칼에 녹색 기사의 목을 베면서 시시하게 끝나지만, 유령처럼 다시 일어선 녹색 기사는 떨어져 나간 머리를 손에 든 채 일 년 후를 기약하며 유유히 떠난다. 게임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이야기


어느새 일 년이 흐르고 가웨인은 서약을 지키기 위해 녹색 예배당을 향해 떠난다. 이 여정은 기사의 다섯 가지 덕목 - 관대함, 신의, 순결, 예의범절, 연민의 실행 -을 시험하는 관문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자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되뇌는 가웨인은 매번 허둥대며 엉성하게 대처한다. 길을 가르쳐준 소년의 친절에 관대하게 보상해주지 않았다가 강도로 돌변한 소년 일당에게 붙잡혀 어이없게도 가진 걸 모두 잃는다. 게임의 징표인 도끼와 ‘어떠한 공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녹색 허리띠, 타고 온 말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다. 


목 잘린 여인 위니프레드의 영혼을 만났을 때는, 잃어버린 머리를 찾아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대가를 원했다가 핀잔을 듣는다. 그를 환대하며 맞아준 성주의 신의를 저버리고 성주 부인의 유혹에 넘어가 망신을 당하질 않나, 성주와의 획득물 교환 약속도 지키지 않고 녹색 허리띠를 숨기는 뻔뻔한 모습도 보인다. 이렇듯 실망스러운 행보를 이어가는 가웨인이지만, 그럼에도 다행히 여정을 멈추거나 방향을 돌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앞길을 가로막는 여우의 마지막 유혹까지 뿌리친 그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녹색 예배당에 도착한다. 


     

이야기의 완성


녹색 기사와 대면한 순간부터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는 마지막 20분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녹색 기사는 게임의 규칙대로 가웨인의 목을 원한다. 한낱 게임이라고 믿고 싶은 가웨인은 “이게 정말... 이대로 끝인가?”라고 묻지만, 녹색 기사의 대답은 가차 없다. 


이 순간 가웨인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그리고 영화는 영리하게도, 그가 전자의 선택을 했을 때 그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생을 빠르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가웨인은 목숨을 부지하고 기사 작위를 받아 왕좌를 계승하겠지만, 평생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녹색 허리띠를 풀지 못한 채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을 버리고 권력을 좇지만, 백성의 신임을 잃고 왕국은 무너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녹색 허리띠를 푸는 순간 그의 목이 굴러떨어지는 이 예언 같은 미래의 환상을 본 가웨인은 마침내 결심한다. “이제 준비됐다”고. 


가웨인은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한 것이다.  그가 스스로 이야기의 결말을 선택하는 순간, 긴 게임은 끝이 나고 하나의 전설이 탄생한다.




    

<그린 나이트>는 삶이라는 게임에서 나의 이야기를 완성할 용기와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영화엔 유독 해골이 자주 등장한다. 숲속에 묶인 채 쓰러져있던 가웨인이 카메라가 평으로 360도 회전하자 해골로 변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해골은 중세 미술의 주제 중 하나인 ‘바니타스(vanitas, 덧없음)’의 상징물이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헛되고 헛되며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 1장 2절의 성경 구절에서 유래한 바니타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탐욕은 헛되고, 생명과 부패를 모두 상징하는 녹색의 자연 앞에서 인간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죽으면 풀이 발자국을 덮어요. 이끼가 비석을 덮고 태양이 떠오르면서 녹색이 사방으로 퍼지죠. 온갖 색조와 빛깔로 녹청이 검과 동전과 성벽을 뒤덮고 당신의 모든 것을 굴복시킬 거예요. 당신의 피부, 당신의 뼈, 당신의 미덕.


영화의 원작은 작자 미상의 중세 서사시 <가윈경과 녹색의 기사>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각 챕터마다 화려하게 꾸민 서체로 소제목(인터타이틀)을 띄워 마치 아름답게 제본된 중세 필사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연출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여기에 감독 특유의 어딘가 음산하고 기괴한 색채를 더해 독특한 분위기의 판타지 모험 영화를 완성했다. 서사적인 측면과 미적인 측면에서 모두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영화 <그린 나이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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