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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Oct 17. 2021

삶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희망

편혜영의 단편 <우리가 가는 곳>을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혜영 작가의 단편소설 <우리가 가는 곳>(NC Fiction Play, 2021)의 주인공은 직업이 독특하다. 실종 대행업. 이는 누군가의 자발적 실종, 즉 증발을 돕는 일이다. 의뢰인은 보통 돈과 관련된 문제나 주변인의(대개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런 직업이 현실에 존재할까 싶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 증발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을 수 있겠다 싶다. 수요가 있으니, 게다가 그 필요가 절박한 이들이 존재하니 당연히 공급도 있을 수 있을 터. 주인공을 찾아온 여자도 그런 절박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여기가 혹시 거기인가요?”
“뭐라고요?”
(...)
여자도 덩달아 크게 말하다가 다시 주눅 든 소리로 “옆방이요”하고 말했다.    

 

‘옆방’은 주인공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비슷한 곤란에 처한 다른 이에게 주인공을 소개할 때 쓰는 일종의 암호다. 대도시의 호텔에 투숙한 한 사업가가 방에 시체가 있다고 놀라 소리쳤더니 컨시어지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면 옆방을 쓰세요”라고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 저 컨시어지처럼 의뢰인을 차분하고 능숙하게 ‘옆방’으로 옮겨주는 일인 셈이다.     




여자는 하필 주인공이 폐업을 준비 중일 때 찾아왔다. 주인공은 ‘나이 든 여자’를 누구도 ‘무슨 일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가정 폭력 피해자인 여자가 동정심에 호소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 보려는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모습에서 그녀를 마지막 의뢰인으로 삼기로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목적지도 없는,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여정을 시작한다.      


“따라가 볼까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흔쾌히 방향을 틀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에는 일단 어디로든 가보는 게 도움이 되는 법이다.     


주인공과 여자의 실종 여행은 고속도로에서 5평짜리 목조주택을 싣고 달리는 화물 트럭을 만나면서 갑자기 경로가 바뀐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어디로든 가보자는 심정으로 둘은 무작정 트럭을 따라간다. 트럭은 어느 시골 마을의 포장되지 않은 진입로에 들어서고 돌덩이, 고추밭 지지대, 나뭇가지, 폐타이어 등의 장애물을 만나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트럭 운전사와 뒤따르던 두 여성은 담배를 같이 피우며 낯을 튼다. 동네 노부부의 집에서 밥도 함께 얻어먹는다. 어쩌다 보니 여정에 일행이 계속 추가되고 결국 한 무리의 구경꾼이 농지 근처 집터에 주택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일제히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비극적인 계기로 시작된 도피 여행이 일종의 소동극처럼 변하면서 어쩐지 즐겁고 따뜻한 삶의 모습을 띠게 된다.      




주인공과 여자는 노부부의 배려로 그 목조주택에 하룻밤을 의탁하게 된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의 이름을 밝힌다. 주인공은 업무상 오랫동안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고 여자는 앞으로 ‘오영지’라는 이름을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때만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실종 대행업자와 의뢰인이 아니라 삶의 희망을 공유하는 동지가 된 듯하다. 내일은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어디든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 사라진 듯 보이게 하는 것일 뿐 실제로 삶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희망 말이다. 소설 속 삽입된 ‘사라진 1달러’에 관한 이야기*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여자가 1달러처럼 사라졌다고 믿지만, 실은 그저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사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끝이 나지만, 독자는 여자가 어딘가에 정착해 이날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관계 속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응원하게 된다.


내일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그게 어디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곳일 것이다. 동시에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곳이겠지. 하지만 어디든 도착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놀이터는 24시>>에 수록된 작품


*디지털 북 링크

NC FICTION PLAY 편혜영 | 『우리가 가는 곳』 (ncsoft.com)


*‘사라진 1달러’에 관한 이야기 발췌

세 남자가 10달러씩 내고 호텔 방을 얻는다. 세 명이니까 총 30달러. 비수기에 손님이 와서 하도 반가운 나머지 호텔 주인은 5달러를 깎아 25달러만 받기로 한다. 5달러를 돌려주러 간 직원이 아무리 해도 5달러를 셋으로 나누기 힘들자 할 수 없이 세 명한테 1달러씩 총 3달러를 돌려주고 남은 2달러는 자기가 가진다. 세 남자는 각각 9달러씩 27달러를 호텔에 지불한 셈이고 직원이 2달러를 챙겼으니 총합은 29달러다. 그렇다면 1달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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