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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Oct 23. 2021

스노볼, 그 안쪽 세계에서 산다는 것

조예은의 <스노볼 드라이브>(민음사, 2021)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사이즈. 아기자기한 모형으로 꾸며진 세계. 살짝 뒤집었다가 내려놓으면 유리 돔 안에서 반짝이 가루가 눈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것은 가짜 눈이 ‘빌어먹게도’(p.36) 아름다운, 스노볼이다.     




조예은의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민음사, 2021)의 배경은 7년째 녹지 않는 눈이 내리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다. 하얗고 반짝이는 방부제 같은 눈이 세상을 그대로 박제해버린 시대. 눈 덮인 풍경은 멀리서 바라보면 저 스노볼 안쪽의 세계처럼 언뜻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재난이 삶의 기본값이 되었을 때,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일상도 과연 그럴까? 종말도 구원도 없이 지긋지긋하게 지속되는 삶. 소설의 주인공 모루와 이월은 망한 세상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상태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고 있다. 이대로 눈이 그치지 않는다면, 이들은 삶을 다시 시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는 걸까?     


다 망했으면 좋겠다. 진짜 다 망했으면.(p.15) 


중학교 2학년의 모루가 바랐던 건 아무런 고통 없이 모두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그런 종말이었다. 이렇게 가짜 눈이 끝도 없이 내리는 세상에 갇힌 채 20대를 맞을 줄은, 심지어 그 눈을 매립 소각하는 특수 폐기물 처리 센터에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뒤집힌 세상에서도 먹고사는 일은 지겹게 계속되기에 누군가는 재난을 뒷수습하는 노동에 투입되기 마련이다. 앞 세대가 망친 세상에서 다음 세대의 삶이 시작되는 건 어쩐지 조금 억울하지만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있고, 우리는 그저 휩쓸릴 뿐이다’(p.92). ‘모루’라는 이름은 매일같이 망치에 부딪히더라도 모루처럼 단단히 존재하라고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다. 세상에 상처를 받더라도 ‘흠집을 무늬로 만들어 버리라고’(p.44). 그러나 소각장에서 얻은 병으로 엄마를 먼저 떠나보내고 이모까지 눈 속에서 실종된 상황에 모루는 도저히 단단할 수가 없다. 이모의 트럭에서 발견된 스노볼 하나, 모루가 추적할 수 있는 사건의 유일한 단서다.

     

모루와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이월은 정신이 이상한 아이라는 소문을 몰고 다녔다. 어릴 적 아빠가 근무하는 제약 회사 연구소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 뒤부터 이월은 그 기억에 갇힌 채 성장했다. 어쩌면 이 모든 재앙의 추악한 비밀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건. 사랑하는 반려견 하루를 잃은 그날 이후, 이월은 죄책감과 상실감을 쉬이 떨쳐내지 못한 채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이월이 처음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된 데는 새엄마의 마지막 부탁이 있었다. “이월아, 엄마를 눈 속에 묻어 주렴.”(p.67) 스노볼 수집이 유일한 취미였던 새엄마는 ‘어떤 외풍도 낡음도 없이 보호받는’(p.98) 그 안쪽 세계를 동경했다. 이월은 새엄마를 그녀의 수집품과 함께 묻어 주기 위해 운반업자였던 모루의 이모 유진에게 연락했다. 선한 뜻으로 시작된 여정은 순하지 못한 세상에 의해 무참하게 끝이 난다. 그 끝에서 이월은 모루가 있는 센터로 이끌리듯 오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모루와 이월은 눈길 위를 달리고 있다. 스노볼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두 사람은 함께 실종된 유진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달리다 보면 어디선가 마주치지 않을까, 목적지 따위 없어도 어딘가에 가닿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하지만 둘이 영영 셋이 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탈주는 의미 깊다. 더 이상 과거의 기억과 재난이 안겨주는 패배감에 갇힌 채 가만히 기다리지만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이월은 생각한다. 함께 한다면 ‘꼭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p.225)이 든다고. 믿고 의지할 단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삶은 구원된다는 사실, 이 작지만 단단한 사실이 재앙의 한복판에서 희망으로 반짝인다.     




팬데믹이 세상을 휩쓴 지 일 년 반이 지났다. 집안에 갇힌 채 유일한 도피처인 책 속을 헤매다 이 소설을 만났다.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스노볼 안쪽 세계와 묘하게 닮은 요즘 세상. ‘이 눈은 언제까지 내릴까. 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이 망할 눈이 그친다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p.74) 소설 속 질문과 같은 의문을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보았을 것이다. 『스노볼 드라이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재난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의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러니 가만히 앉아있다가 무너지는 세상에 파묻히지 않도록 숱한 로드무비가 안겨주는 통쾌함을 떠올리며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가라고 말이다.     


이 눈은 언제까지 내릴까. 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이 망할 눈이 그친다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p.74) 


조예은 <스노볼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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