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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y 10. 2022

물고기를 포기하고 얻은 것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곰출판, 2021)는 프롤로그에서부터 나를 사로잡은 책이다. 나는 저자 룰루 밀러와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미련하고도 끈질긴 인물에 순식간에 매료됐다. 분류학자로서 당대 어류 중 5분의 1을 발견했다는 그의 성취도 놀라웠지만, 지진으로 파괴된 어류 표본들에 직접 바늘을 들고 이름표를 꿰매었다는 에피소드는 경이에 가까웠다. 30년 연구가 수포로 돌아간 순간에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는 불굴의 의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강인한 사명감. 비록 그것이 바늘 하나로 이룬 허술한 혁신이더라도 그 속엔 분명 교훈적인 면모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인간과 삶에 어떤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지리라 예상했다. 저자의 집요한 추적이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반전을 드러낼 줄은, 이야기가 경로를 이탈해 완전히 새로운 곳에 도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자는 일곱 살 때 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넌 (개미보다도)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었다.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지만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가혹한 말이었다. 저자는 성장하면서 내내 이 말의 자장 안에 머물며 혼돈의 세계, 삶의 무의미성, 인간 존재의 하찮음에 무력감과 우울감을 느낀다.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p.56)라는 냉엄한 진실 앞에서 염세주의는 헤어나오기 힘든 심연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병원에서 깨어나기도 했으며, 삶을 쉽게 끝장낼 수 있는 총기의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렸음도 고백한다. 그래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그녀에겐 중요했다. 그녀는 망친 인생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할 정당성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긍정적인 피드백이 없이도 장기적인 목표에 뛰어들게 해주는 “그릿Grit(끈질긴 투지)”(p.142)이 아니었다. 이 책의 175페이지에 이르러 조던이 물고기를 확보할 때 사용한 독 ‘스트리크닌’(p.175)의 비밀이 누설되는 순간, 독자는 그에게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안긴 “낙천성의 방패”(p.80)가 때론 오싹한 무기로 전락하기도 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긍정적 착각”(p.139)은 자기기만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는 분류학자로서 다윈의 연구를 받아들였지만 ‘자연의 사다리’(p.203)라는 개념도 포기하지 않았다. 생태계에서 인류를 사다리 가장 위 칸에 놓는 이 개념은 인간 안에서도 혈통을 선별하고 “부적합자”를 말살시키는 우생학(eugenics)으로 발전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실체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사람을 독살하려 했거나 적어도 은폐한 사람이었으며, 한 시대의 악을 낳은 열광적인 우생학자였던 것이다.   

   

    이 책의 경이로움은 놀랍게도 그 진실과 맞닥뜨린 이후에 있다. 길고 긴 추적 끝에 저자는 돌고 돌아 다시 처음의 질문 “너는 중요하지 않아”(p.58)로 돌아온다. 세상은 여전히 혼돈이고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자연에서 질서정연한 위계를 찾으려는 건, 인간의 무지와 오만의 소산이었다.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p.206)고 다윈이 말했듯이,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p.262)이며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자의적으로 그은 경계였다.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은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p.235)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수많은 차이가 있는 존재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 게으르게 몰아넣은 것에 불과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평생에 걸쳐 연구한 물고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자의 이 모든 여정은 의미가 없는 걸까?     


    나는 그녀가 호기심과 의심 끝에 도달한 지점이 결코 제자리는 아니라고 느꼈다. 그녀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으며 언제나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민들레 원칙(dandelion principle)”(p.189)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떠올린다. 민들레는 주위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잡초’이지만 동시에 여러 효능 성분들을 함유한 ‘약초’이기도 하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지는 민들레처럼, 모든 생물에게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성이 아닌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p.250) 회의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너머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종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혼돈의 세상에서 그 종이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주는 힘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면 ‘부적합자’라는 범주 구분에 넣었을 ‘장애인’,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 그 어떤 존재도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p.228)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인류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며 “별들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게” 된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읽고 물고기를 포기함으로써 민들레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저자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희망에 대한 처방’(p.263)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다윈의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이 이 책에도 적용된다고 느꼈다.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p.128)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p.257)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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